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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태숙 시인 / 와온(臥溫)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1.

함태숙 시인 / 와온(臥溫)

 

 

  지는 해 보자고 순천만 갈대밭 달려갔더니

  해는 막 지고

  내 살 네 살 없이 안고 누운 겨울 뻘밭 보았네

  덥게 누웠다 하여 와온臥溫이라니

  지는 해 받느라 더운 게 아니고

  남의 찬 살 보듬느라 따스한 게 온기인가

  한 몸을 쪼개어 둘로 떨어진 운주사 와불님네

  부처가 꿈꾸는 내세가 있다면 저와 같을 것이라

  한 이불 속 누웠다 떠난 인연들

  허공에 둥둥 떠 오면 저와 같을 것이라

  어느 생에선가 당신을 잃은 줄만 알았는데

  당신은 처음부터 여기 있어

  만난 바도 떨어진 바도 없다 하니

  산다든지 죽는 것도 모두 이 반죽 속이라네

  제 몸 떼어 제가 먹는 익반죽 속이라네

  나, 살다가 못내 사무치는 게 있으면

  불 꺼진 겨울 순천만 찾아가려네

  당신은 더웁게 누워 나를 맞이하기 바라겠네.

 

 


 

 

함태숙 시인 / 우리들의 오랜 구호

 

 

  아까부터 저 여자는

  티벳 식 절을 하고 있다

  그녀의 구호는 달라이 라마

  한 쪽에선 파룬궁 학살을 고발하고

  또 한쪽에선 줄기세포 진상규명

  이 모든 풍경을 배경으로

  청와대 관광객들은

  연신 셔터를 눌러대며

  공간을 동시에 점유하고 있는

  시대와 반시대

  인간과 비인간

  과거와 미래의 얼굴을 찍고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순간의, 저 신성한 표정들

  오월의 볕처럼

  그것은 밝다, 가볍다

  중국 남방어의 왁자함 속에서

  먹고 놀고 왔다 가는 모습은

  한 잎으로 매달렸다 손을 놓는

  버드나무 한 가지의

  잎맥처럼

  나무의 전체를

  역사의 전체를 싣고 있어도

  존재는 무게가 없다

  가령, 폭우에 찢기거나

  벌레에 씹히는, 한 잎의 비유로써

  우리가 어떠한 고난도, 의당

  자연의 한 형태로 수락한다면

  저 죽은 지렁이와

  그것을 끌고 가는 바쁜 일개미

  그와 같이, 팔랑팔랑

  삶이 아름답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비처럼, 아까부터 저 여자는

  티벳 식 절을 하고 있다

 

 


 

 

함태숙 시인 / 뼈 해장국 드는 당신께

 

 

  뼈 해장국 한 그릇

  수북하니

  선사시대 패총 같은

  잡뼈를 받아 놓고

  돼지라면 암퇘지

  등뼈 가랑이 벌리고

  핥아 먹고

  빨아 먹고

  살점 발라 먹는 그 입술이

  쿠니링구스

  당신은 죽은 여자와 몸을 섞는 것이다

  내장의 부드러운 융모 속

  남김없이 빨려 들어가

  당신 몸의 어느 찬 주머니엔가

  숨겨 놓을 꽃씨만 있다면

  어느 주검을 마다하겠는가

  시든 몸이더라도

  떨리는 내세

  바람 드나드는 무릎 뼈 오므리며

  나는 힘껏

  더운 진액 받아 삼키겠다

  어느 먼 초야에

  당신에게 이를 그 방편으로

  목구멍에 꽃술 오른다

 

 


 

 

함태숙 시인 / 부르스를 추고 싶다

 

 

  시간이란

  이제 보니 촉각 같은 것

  왜 견뎌주지 못했을까

  디스코를 출 만큼

  청춘에 몰입하지도

  부르스를 출 만큼

  인생에 연민도 없던 시절

  쾌속선 한 척 빠르게 지나보낸

  물과 같으리라 생각했지만

  늙는다는 것은

  하중을 싣는 곳만 모질어져

  긴 쇳소리를 내는 철길

  두 철로 사이

  만져지지 못해, 나의 중심은 비었다

  왜 견뎌주지 못했을까

  머리 위 조명을 비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암전이었던

  그 많은 나이트 나이트들을

  이제 보니 시간이란

  오랜 키스 같은 것인데

  영혼이 자신의 물질성을 이해할 때까지

  조금만 더 천천히 더듬어 달라

  전신을 휘감은 부르스처럼

  치렁치렁 엉키며

  흐느끼며

  나의 모든 맛을 그대에게 주고 싶다

  영업, 시간이 끝나도

  우리가 한 몸으로 빙빙 돌 수 있게

  어느 나이트에서건

  어느 별자리에서건

 

 


 

 

함태숙 시인 / 화이트 크리스마스

 

 

  낙태에 유산에 사산에, 범벅된

  피와 불순물

  짓이긴 태아의 형상으로

  신발들은

  학살의 증언을 계속 하고 있었다

  홀로코스트 기념

  유리

  관

  이천 년 전, 숨구멍도 채 안 닫힌

  사내아이 머리통처럼

  비극으로 한 몸이 된

  신발들은

  베들레햄에서 목 잘린

  예수 그리스도

  인류의 유리

  자궁에

  죽음에 가려진 비탄과

  열망에 찬 生과

  존재의

  낱낱의 통증을 담고 있나니

  세상에 올 때는

  홀로코스트의

  신발을 신고 오리라

  닳은 구두 뒤축과 해진 헝겊 신

  그 모든

  최후의 진실로, 나는 오리라

  종말처럼 부활에는

  그대 영혼을 신고, 매일매일

  그대에게서 태어나는, 신성한, 죽음

  보라

  홀로코스트의, 먼지 앉은

  神발들을

  지금, 그대가 신고 있는, 흰 발을

 

 


 

함태숙 시인

1969년 강릉에서 출생. 중앙대 심리학과, 同 대학원 임상심리학 전공. 2002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새들은 창천에서 죽다』(한국문연, 2017)와  『그대는 한 사람의 인류』(시인동네, 2018)가 있음. 2019년 서울시 문예진흥기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