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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미소 시인 / 구상나무 광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1.

정미소 시인 / 구상나무 광배

 

 

크리스마스날 아침, 덕유산에 올랐다

‘햇빛의 집’ 가족들과 함께 올랐다

정상에 다다르자 함박눈이 쏟아졌다

눈 속에

머리도 팔도 없는 구상나무 고사목이 보였다

천년을 살며

수액이 다 빠져나간 빈 가슴 속으로

함박눈이 들어차고 다시 비워주고는 했다

가지마다 반짝이는 가시 잎들이

고드름을 달고 있었다

요셉이가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어 구상나무 우듬지에

씌워 주었다

시몬이 목도리를 벗어 구상나무 목에

둘러 주었다

함박눈이 펑 펑 쏟아지는 덕유산 정상에서

우리 모두 박수를 쳐 주었다

누군가 나지막이 크리스마스 캐롤을 불렀다

모두 따라 불렀다

그때 나는 구상나무 우듬지에서

반짝 빛나는 광배를 본 것 같았다.

 

 


 

 

정미소 시인 / 염소나무를 아시는지요

 

 

내 허파 속에 깊이 뿌리내린 염소나무를 아시는지요

 

귀를 기울이면, 염소나무에 매인 염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요 별이 된 내 아기의 젖투정 같아요 놀란 새들이 푸드득 날아가고 허파의 하늘에 새털구름이 몰려와요

 

그때마다 나는 염소의 뿔을 가만 가만 쓰다듬어요 아기별이 염소의 순한 눈빛 속으로 사라졌어요 염소의 목줄이 내 아기의 탯줄처럼 감겼다가 풀어져요

 

염소나무가 유선을 부풀려요 초록으로 부푼 유두가 아프도록 젖줄을 빨아요 염소의 입가에 젖물이 맴돌아요

 

그날 밤, 밤하늘에 오른 염소자리 성운에서 별빛마다 리라 소리가 묻어났어요 그날 밤 내 목줄기 좁은 길을 드나들던 염소가 사라졌어요 내 아기도 사라졌어요

 

그날 밤, 나는 내 허파에 다시 염소나무를 심었어요.

 

 


 

 

정미소 시인 / 사랑놀래기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처음 너를 만났다

붉은 등의

물결무늬 속 검은 반점을 문신처럼 내 보이는

사랑놀래기가 나처럼

가쁜 숨 몰아쉬며 전속력으로 달아나는

사랑놀래기의 눈 푸른 바다를 보았다

저 바다 속

누군가를 쫓아가고 누군가를 피해 달아나는

절대 절명의 사랑, 돌 같은 사랑

그렇게 내 마음에도 물결무늬 문신을 새겨 준

붉은 등의 바다를 보았다

고통도 사랑도 한 순간이라고

사랑놀래기

반짝이는 햇살무늬를 보았다.

 

 


 

 

정미소 시인 / 산벚나무 1번가 구름 오솔길

 

 

어릴 적 동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에 올랐다 양지바른 곳 사금파리 조각으로 맨드라미 꽃잎을 콕콕 찧어 소반을 차리던 친구의 활짝 웃던 하얀 대문니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칠부 능선쯤 울음처럼 피어나는 연붉은 구름 한 덩이를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난 산벚꽃나무였다

 

산벚꽃들이 눈 집처럼 화사한 꽃무덤 집을 지었다 꽃잎들이 성근 떼 사이로 떨어질 때마다 연초록 이파리들이 훤히 드러나는 애장터 같았다 어릴 적 동무가 나를 기다렸구나

 

한달음에 산벚나무 1번가 구름오솔길 오르니 꽃무덤 속에서 종달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먼 날,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정미소 시인 / 공명소리

 

 

옹기전에서 옹기 구경을 했다

 

큰 독과 작은 독, 중두리 항아리가

하지의 햇살 아래 수런수런 숨소리를 내는 것 같다

 

어머니가 하시던 것처럼 나도

옹기의 표면을 손으로 톡 톡 쳐 보았다

산사의 바람 같은 서늘한 공명이 들려오는

빈 항아리

고추장, 된장이 가득 가득담긴 독들도

바람 속에 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머니가 독을 쓰다듬으며 하시던 말씀

독처럼 비우고 살 줄 알아라

 

옹기전에서

그 말씀, 공명처럼 들려왔다.

 

 


 

정미소 시인

강원도 동해 출생. 숭의여전 응용미술과 졸업. 추계예대 영상문예대학원 졸업. 『아동문학세상』 동화 등단. 2011년 <문학과창작> 신인상 등단. 시집 <구상나무 광배>. 막비시동인. 캔캔키즈스쿨 어린이집 원장. 2011 문학과창작 신인상. 2017년 제7회 리토피아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