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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윤 시인 / 깊어진다는 것, 물음표 속의 길 찾기
삶이 하나의 길 찾기라면 나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간 수없이 많은 세상을 기웃거리면서도 나는 정작 마음에 드는 그 무엇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찾으려니 하고 달려갔지만 언제나 그곳에 다다르면 정작 내가 찾는 것은 흐르는 강물처럼, 막힌 데 없이 내달리는 바람처럼, 아니 저 거대한 영봉처럼 훌쩍 나에게서 멀어지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또 새로운 길을 찾아 늘 떠돌아야만 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의 도정에서 나는 요즘 깊어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길이라는 것이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마음의 문제. 세상을 좀 더 깊이, 폭 넓게 들여다보는 내 마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깊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흔히들 생각의 깊이, 시선의 깊이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보다는 잘 안 됩니다.
나는 깊어지기 위해 오늘을 견디고, 깊어지기 위해 내일을 삽니다. 깊어진다는 것은, 저 흐르는 강물처럼 바다처럼 깊어진다는 것은 욕심을 버려야만 그 끝자락이라도 겨우 잡아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요? 이 깊어지는 도정이 바로 또 하나의 다른 삶임을 나는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비포장 가시밭길이고 계곡이고 벼랑일 것입니다.
오늘, 그 험난한 길을 가기 위해 나는 깊어지려 합니다. 그러나 깊어진다는 대명제 앞에서 그저 막막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의 시가 한껏 깊어져서 마지막에는 한 큰 울림의 근원이 되기를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임동윤 시인 / 어두워질 때까지
졸면서도 나는 달려간다 잠시라도 멈추면 녹슬어 안 된다는 듯이 미친 듯이 달려간다, 보이지 않는 우주를 향해 무엇을 붙잡아야만 한다는 뚜렷한 의식도 없이 달려간다, 내가 우뚝 멈추어서면 이 속도가 와르르 무너질까 두려워, 이 속도가 멈추면 휙휙 지나치는 사람들이 저만치 앞서갈까 두려워 달려간다, 한평생 달려가도 늘 그 자리인 길 재작년에 달려간 길을 오늘도 달려가고 있다 부산행 KTX를 탄다, 비행기를 타고, 미사일을 타고, 우주선을 타고 달려간다 울퉁불퉁 비포장 가시밭길을 달려간다 왜 달려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려간다 엉금엉금 기면서, 뒤뚱뒤뚱 걸음마를 배우면서 나는 달려간다, 자면서도 뿌득뿌득 어금니를 갈면서 달려간다, 어두워질 때까지 무작정!
임동윤 시인 / 겨울 동화
꽁지 짧은 새 한 마리 처마 밑에 겨우 몸 숨기고 있다 펄펄 날리는 눈발에 한껏 날갯죽지를 밀어 넣고 말갛게 눈만 반쯤 뜨고 있다 차츰, 경계가 지워지면서 물살이 밀려들고 있다 아니, 가까이서 멀리로 멀리서 다시 집 마당으로 환한 물살이 먹물처럼 스미고 있다 잔등 드러낸 갯벌에 밀물이 들듯 한없이 부드러운 물살이 늦은 저녁 시간을 한껏 밀어내고 있다 하늘과 땅이 한 몸이 되면서 경계가 더욱 환해지고 있다 그곳으로 바람이 불쑥 손을 내밀어 어둡다는 느낌은 지워진지 오래다 숲도 산도 집도 싸리나무울타리도 벌써 한 풍경 속에 든 것을 밤이 이슥한 후에야 알았다 잠들 수 없도록 추녀까지 차오르는 저 환히 밀물지는 소리, 사락사락 밤새도록 처마 밑이 환해져 있다
임동윤 시인 / 환한 아침
밤새 눈 내리다 그친 아침, 어머니 생각에 머쓱하다
여름방학 끝나 집 떠나올 때, 이모부 드리라고 인절미 한 보따리 이고 비 뿌리는 산모퉁이 굽이굽이 돌아 옥방, 광회 지나 분천까지 머리칼 적시던
그 겨울 눈보라 길 막던 추운 새벽에도 삼 십리 먼 길 눈 속을 뚫고 젖은 신발 발가락 얼어터지도록 마중 나와 책가방이며 옷 보따리 챙겨 머리에 이시던
눈물 그렁그렁하시던, 그 어머니가 내 바쁜 삶 하나로 까마득 잊고 살다가 어쩌다 눈 내리는 날이면 빙판길 발 헛디디실까 불쑥, 생각나는 이 머쓱함
숨결 가다듬고, 꾹꾹 침 바르듯 0×1-2××-0×6× 자판을 누른다 눈 내려 더욱 환한, 이 아침
임동윤 시인 / 납작해진 잠
왕복 4차선 국도변에 산국 흐드러진 어느 날 차마 못 볼 것 보고 말았다
양탄자처럼 아스팔트 한복판에 납작해진 한 고양이의 주검을 본 것이다
제 스스로 속도에 취해 진실을 몰랐을 때, 속도 위에 날개를 단 놈도 있다는 것을 간과했을 때 휙, 그는 몸을 날렸던 것,
날렵하고 약삭빠른 생각이 그의 처세술이듯 스스로 판단한 일이 진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판단이,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하는 그런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모르는 갓난아이의 곱디고운 얼굴이 저 연둣빛으로 반짝거리는 봄날 새순이 뭉클, 내 가슴을 아프게 파고 들었던 것이다
캄캄한 세상 더듬어 밤길 가듯 한 판단이 스스로 자신을 허물듯이 문득, 속도를 믿었던 저 납작해진 잠을 본다
임동윤 시인 / 복지회관에서
자식들에게 제 털 다 뽑힌 노인들이 복지회관 식당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다 한 끼의 점심을 구걸하는 행렬들 허리가 바닥에 닿을 듯 구부러져 있거나 더러는 쿨럭쿨럭 밭은기침을 토하면서 몽실몽실 뜨거운 김 오르는 밥 한 사발, 국 한 그릇이 저들에겐 진수성찬이다 유모차에 빈병이며 종이박스를 가득 싣고 막무가내로 찻길을 역주행하는 노인들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다 뽑아주어 마른 버짐나무 껍질 같은, 쭈글쭈글한 살 다 드러낸, 이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으로 차례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처절하지만 그러나 이 시간이 노인들에겐 천국이다 사업실패로 야반도주한 아들, 집 떠난 며느리와 뿔뿔이 흩어진 손자들, 어쩌다 하늘나라 먼저 든 당신 생각에 밤이면, 가슴 쥐어뜯고 뜬눈으로 살지만 그래도 남은 목숨 기댈 곳은 여기라고 자식들에게 모든 것 내어준 어버이들이 식당 앞 복도에 길게, 재잘거리며 서 있다
임동윤 시인 / 겨울 불영사에서
연이틀 폭설이 내리자 산과 계곡이 문을 꽁꽁 닫아걸었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일 개울물도 돌다리도 하얗게 지워진 시간의 앞뒤에서 마음까지 비운다 어느 세상 끝자락인가, 침엽수들이 바닥으로 눈 무게를 털어내느라 몸을 비우고 있다 나의 몸은 얼마나 지방덩어리여서 이리 둔하고 갑갑한 걸까 나의 길도 지워져 보이지 않는다 햇살도 눈 쌓인 바닥에 닿아 칼이 되고 은빛 파닥이는 물고기가 되는가, 흰 물살에 닿아 바람이 되다가 나 또한 한개의 칼이 되어 번뜩일 때 내가 찾는 유일한 길 하나, 산과 계곡이 오직 한 몸인 나라에서 너덜길 살아온 몸을 씻기며 징징 울고 있다
- <유심> 2010.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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