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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숙 시인 / 물의 감옥
진흙은 끊임없이 뻗어나가고 싶은 관성에 굵은 매듭을 친다 목 밑까지 차 오르는 감탕물에 몸을 묻고도 제 속의 뼈저린 수절인 듯 초록의 연잎, 물에 젖지 않는다 사바의 수채 속에 떨어진 한 알의 연씨 제 뿌리를 내리는 일에 치성을 다한다 수면 위를 내달리는 전생의 바람을 만나 내 안에 잠든 향기를 깨워 멀리 풀어보내고 싶다 얼마나 깊은 기도를 올리면 끅끅 헛구역질을 게우며 몸이 열릴까 긴 입덧 후 열락 같은 진통이 끝나면 아, 그 땐 그만 그대 중심 깊숙이 스며들어 몸 풀리라 쩍쩍 갈라지는 연밥을 열고 나와 이 진창의 감옥에 시간의 씨알로 묻히리라
수 백년이 지나도 싱싱한 가임의 시간으로 홀로 남아
유현숙 시인 / 굴비 -불꽃 3
물기 뚝뚝 흐르는 생조기에다 굵은 막소금 한 웅큼 뿌린 것인데 내 전신이 쓰라리다 나는 소금에 절여진 굴비 한 마리가 된다 깊어진 겨울 간조기 두름을 처마 끝에 내건다 바람 차고 내 몸 속속들이 얼어붙는다 전신에 박힌 소금 알갱이들 살 속을 파고들어 오장육부가 쓰다 뜬눈에 보이는 하늘빛도 쓰다 얼마나 더 얼고 써야 이 두름 풀고 저 하늘 건너 지천의 소금밭에 염장될까 거기 불꽃으로 누워 내 눈과 귀 텅 비어 컹컹 개 짖는 소리 들을까
절여 단단해진 눈자위에 오소소 소름 돋는다
유현숙 시인 / 명주수건
-명주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누에의 일생을 생각해 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빙빙 모가지를 돌리며 누에는 스스로 토해 낸 젖빛 실로 제 몸을 가둘 고치를 튼다 뱃속 마지막 남은 한 오라기의 실 마저 죄 뽑아내어 허공에다 촘촘히 무덤을 짓는다 영면은 또 하나의 탄생인 그 무덤의 속은 얼마나 따뜻하고 섬세한 탈바꿈일까 내 뱃속 허기도 거푸거푸 풀어내어 결 고운 죽음 한 채 짓고 싶다 서걱서걱 갉던 뽕잎 슬그머니 밀쳐두고 나도 몇 령의 잠에 따라 든다 진득한 탈피와 애절한 변신을 꿈꾼다
큰 집 과수원 언덕배기에 걸터앉은 잠사앞 마당의 화톳불 눈멀고 귀 잠든 생의 불씨를 투덕투덕 토하고 있다 제 살 태운 생의 피륙을 뜨겁게 짜고 있다
유현숙 시인 / 국화빵
지하철 출입구 한구석에 겨울 장승처럼 간이노점의 국화빵틀이 서 있다 과거의 모서리 몇 군데가 깨진 빵틀만큼 오래된 중년의 남자가 낡은 기억들을 몇 번씩 뒤집으며 노릇노릇 구워낸다 베어 물 것도 없이 한 입 크기의 백동전 만한 추억들이 두어 줄 좌판 위에 널려있고 뼈가 삭는 고민도 없이 뒤집었던 젊은 날의 가책들 위에 생전 잊혀지지 않을 상처같은 팥알갱이들이 밀가루 반죽 위에 듬뿍 얹혀진다 바람난 계집처럼 몸 뜨겁게 달은 화덕은 이제야 속죄의 문신을 새기듯 흩어진 부끄럼들을 버무려 또렷이 박아낸다 누군가의 장식이면서 상처이기도 한 국화꽃 문신을 꾹꾹 찍어낸다 골목 끝에서 빵틀처럼 낡은 세월 하나가 불어오고 있다
유현숙 시인 / 묵형(墨刑)
나뭇잎을 덮고 잠들었습니다 잠 속으로도 비는 들이칩니다
볕 좋은 오후에는 집을 나서지만 골목 끝이 짧고, 그만 되돌아 옵니다 사람들 속에서도 나는 춥습니다
단단한 목질인 자단(紫檀)은 짜개면 도끼날에 자색 물이 묻어 납니다 땅이 뜨거워지는 여름과 지리한 장맛비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요 지열과 습풍이 나무뿌리에 그렇게 스민 까닭이지요
내 안에다 자자(刺字)한 이야기들 말고는 무엇으로도 형상하지 못한 젊은 날의 문자들이 있습니다 자단 같은 날들이라 부를까요 천둥이 몇 차례 울고 바람이 붑니다 높은 산의 그늘에서는 철쭉꽃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그늘에 누운 꽃은 통째로 말라가고 당신을 보낸 뒤 나는 아직도 내실內室의 커튼을 걷지 못합니다 마루에서도 방에서도 커튼은 무겁습니다 오래전에 당신은 내 살을 타서 열고 별 한자리를 묻었지요 살을 꿰어 시침질한 자국은 당신이 남긴 마지막 말씀이라 여겨도 되는지요 나는 쓸쓸해져서 오래도록 들여다 봅니다 사기 찻잔에 스민 차 맛처럼 쓸쓸함이란 나를 아프게 합니다 미궁에서 보내는 수금(囚禁)의 시간입니다
지난날이 깊어지면 늘 이렇습니다 당신이 떠난 뒤 잠 속으로도 비가 들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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