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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 시인 / 나는 징이다
나는 징이다. 바람이 와서 툭 툭 칠 때마다 펄 펄 끓던 불가마가 생각난다.
온 몸이 쇳물로 녹여지며, 벌겋게 달아오르는 고열과 옹고집이 쇠망치로 펑 펑 매질을 당했다.
한 뜸 한 뜸 불 담금질을 견디며 내 안의 울음을 깨야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옹이로 박힌 울음주머니가 부어올라 더는 견딜 수 없는 날, 징 징 징 쇠 울음으로 울었다.
가슴이 돋움질치는 소리와 소리의 메아리가 한데 어루리도록 온몸을 내던지며 울다본즉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큰 울림통이 되었다.
산다는 건 불가마속이어도 견디고 볼 일이다.
가파른 벼랑에도 꽃은 피고, 절망의 그늘에도 온기로 다가오는 햇살. 오늘, 녹청 꽃 피어도 좋은 내 몸에게 고마워. 고맙다고 말한다.
나는 징이다.
정미소 시인 / 나뭇잎은 나무의 입이다
해질녘, 2층 방 창문을 두드리는 먹감나무의 두툼한 입술에 귀 기울인다 말하고 싶어 내 창을 기웃거리는 안색이 붉은 나뭇잎, 달싹거리는 잎을 따라 줄기와 몸통에 고인 말들의 문이 문을 두드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랫입술을 도르르 말았다가 펴는 입, 말매미의 울음과 고추잠자리 쉬어간 자국마다 실주름이 진다 빈 감꼭지가 풋풋한 여름으로 차오르는 소리를 듣는다 천둥과 장맛비와 긴 가뭄이 가두었던 먹감나무의 깊은 그늘이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오고 있다 나무의 입이 무거운 속내를 열고 있다.
정미소 시인의 시집 『벼락의 꼬리』15쪽
정미소 시인 / 느티나무에게
카페 ‘몽마르트’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은발의 고목에 귀 기울인다 몸 하나로 수직의 하늘을 건너고 있는 우직한 어깨 너머로 오후 네 시의 햇살이 숄을 두른다 티스푼으로 홍차의 티백을 꾹꾹 누르며 봇물 터지는 너의 매무새에 속말을 연다 숨죽인 계절에도 황소바람은 불어와 심장에 네 개의 스턴트를 박고 벼락 맞은 봄 품에 안았던 황조롱이도 일가를 이루어 떠나고 딱 지금이야 죽고 싶어 합병증이 도사리는 뿔테 안경 너머 동공이 출렁거린다 오후 네 시의 몽마르트 긁히고 멍들고 깁스로 이은 쇳조각을 따라 에디뜨삐아프의 젖은 음성이 진통을 몰고 온다 내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느티나무야.
정미소 시인 / 초승달에게 반하다
그의 내향성은 후천적이다 천성이 어질고 반듯하여 피붙이의 보살핌을 조석의 낙으로 삼으니 기질이 유순하나 성나면 올가미의 올을 물어내며 생채기를 남긴다 바닥의 바닥을 또각거리며 몸을 옥죄는 세상의 뒷골목 군소리 없이 버틴 하이힐의 저 안쪽 비좁은 숨 막힘이 박리증에 시달린다 울분이 고여 제풀에 사색이 된 엄지발톱 입과 귀를 닫은 채 안으로 안으로 파고든다 피붙이의 허물을 덮으려고 안간힘 쓴 그의 등에서 초승달이 웃는다 각질 더미에서 더는 버틸 수없는 그의 속 소리를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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