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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현숙 시인 / 은하의 전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2.

유현숙 시인 / 은하의 전설

 

 

떨어진 나뭇잎이 얇게 쌓인 눈에 덮여 있다

몇 계절을 잠든 동안

어둠 너머, 기다림 너머, 별빛 너머 설렘은

내가 손 내밀어 받아 든 첫 빛이다

기차가 지나는 낮은 언덕에 기대어, 기대고 울던 나를 생각한다

기차는 오늘도 나를 지나쳐 갔고 나는

오늘도 여기 서 있다

그리움이다 검은 혁명이다 슬픈 가계와 거역의 기록이다

지새운 밤들과 치열했던 질문과

모의와 추방과 대답 없는 되물음에 대하여

그 모든 직립(直立)이 얼마나 치열한 전쟁이었으며

또 얼마나 잘못 쓰고 있는 전 생애인지

참회하는 자의 늦은 기도처럼 타는 노을 아래를

지나가는 행인처럼

빈 형장을 적시는 빗물처럼 계절은 지나갔다

가장 아픈 날 쳐다본 은하는 어느 전설에 닿아 있을까

어둔 길 어디쯤에 내려서서 숨을 고르면

나는 왜 아직도 목이 메는가

계절의 먼 뒤쪽에는 폭풍설이 치고

시간의 마디마디를 들고 참회록을 쓰는

뼈가 아픈 푸른 밤

몸피보다 작게 판 눈 굴에다 잠자리를 마련한 북극곰은

동면 중에도 새끼를 낳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못한 채 내 안에 박제된

그대라는 전설

그 불꽃 속으로 내일도 걸어 들어가는 사람 있다

 

 


 

 

유현숙 시인 / 최북의 눈에 내리는 비

 

 

조선 화가 최북은 제 눈을 찔렀다 고흐는 제 귀를 잘랐다 종신형을 살던 도니 존슨은 초콜릿을 개어 감옥에서 그림을 그렸다

폭풍설에 묻히는 산골의 긴 밤을 아이와 함께 걷는 풍설야귀인을

잘린 귀의 자화상을

초콜릿이 풀어낸 제 바닥의 색채를 그렸다

폭염을 걷던 어느 화가는 낯선 커피점에서 커피액을 찍어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암흑이건 소리 밖이건 갇힌 감옥이건 커피점이건 누군가 고독한 손길로 붓질을 하는 곳에는 빗소리가 들린다

해수관음이 바라보는 그 바다에서 범종이 운다

빗소리가 사라진 다음의 적막과 적막이 우는 공명이 있다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단풍나무 숲길에 앉아 석류를 쪼갠다 붉게 물든 손가락을 본다

손가락이 붉어지는 동안

 

최북이 찌른 한 눈을 생각하고 한 귀가 잘린 고흐를 생각하고 도니 존슨의 감옥과 초콜릿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화가가 있는 작은 도시의 비 내리는 가을을 생각한다

 

 


 

 

유현숙 시인 / 불의 죄

-Beethoven, Piano sonata NO.14

 

 

오디오에 불을 지핍니다

진공관에 불빛이 차오르고 차오른 불빛이 마루에 쌓인 수북하던

어둠을 걷어냅니다

안마당도 삼나무 가지도 지난봄에는 무르고 연했지요

 

마룻바닥에 엎드린 내 등짝에, 뺨을 묻은 손등에

달빛은 참 푸른 음악입니다

알프레드 브렌델이 연주한 C#단조의 셋잇단음표들입니다

가고 없는 사람의 기록은 공간이기도 그 공간을 질러가는 불이기도 했습니까

 

지금도 곁자리를 비워 둡니다

그 불을 코카서스 산정에서 훔쳐 올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과 나란히 목침을 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달빛 소나타로 물들고 싶습니다

 

이생의 매일을 독수리 대신 당신에게 내장이 뜯긴다 해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회향나무 잔가지가 붉게 타오릅니다

이곳은 프로메테우스가 사랑한 인간의 마을입니다

 

 


 

 

유현숙 시인 / 꽃지다

 

 

새들은 새들의 언어로 서로를 부른다

새가 새를 부르고 새가 새에게 대답하는 소리에

귀 먹었던 적 있다

왼손으로 제 멱살을 거머쥐고 오른손에는 권총을 움켜쥐고

내 사랑을 위하여! 딱, 큰 은행 한 번 털고 싶다

던,

사랑한다사랑한다 멀리서 우는 우레로

가까이서 맞부딪는 낙뢰로

우르르, 쾅쾅, 번쩍, 눈멀고 귀먹고 암흑이던,

그 때마다 꽃 졌다 아직 지는 꽃 있다

새가 새를 부르고 새가 새에게 대답하는 새 울음소리 같은

새들의 江이

몸 아래로 흐른다 갈비뼈가 젖는다

몸이 몸을 부르고 몸이 몸에게 대답하는 소리에

깜박 눈멀었던

목이 긴 짐승의 목 메인 울음소리……

여자가 엎드려 있다, 달빛이 여자 위로 쏟아지고 달빛보다 희게,

여자가 지금 진다

꽃 진다

 

-시선 2007년 봄호

 

 


 

유현숙 시인

1958년 경남 거창 출생. 2001년 《동양일보》신인문학상과 2003년 《문학 선》 신인상을 통해 등단.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시집으로 『서해와 동침하다』(문학의전당, 2009), 『외치의 혀』.가 있음. 온시 동인. 시산맥회원. <오거리>엔솔러지 발행-제3의 문학사(2003년 7월). (경신, 신해욱, 안익수, 이희원 시인과 함께 낸 5인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