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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옥엽 시인 / SRY 유전자에 관한 단상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2.

조옥엽 시인 / SRY 유전자에 관한 단상

 

 

  1.

  저녁을 먹은 남편은 방바닥에 모로 누워 텔레비전을 켠다 그이의 말 없던 남성도 동시에 켜진다

알토란같은 고환 속에 생식의 불을 붙인 저 최초의 스위치는 오랜 동안 나와의 낯익은 대화를 접선(接線)시키지 않는다

 

  세렝게티 초원의 성난 사자 떼가 먹잇감을 두고 포효하듯 100킬로가 넘는 거구들이 챔피언벨트를 위해 링 위에서 뒹군다 빨간 팬티의 라이언마스크가 드롭킥 헤드록 해머록에 이어 상대방을 바닥에 내리꽂고 승리감에 도취해 괴성을 지른다 흥분한 남편이 팔딱 일어서고 나는 주사바늘처럼 예민해진다

 

  프로레슬러의 사각매트만한 방안이 달빛에 앵글로 잡힐 때 내 검푸른 연민의 필라멘트는 파르르 떨면서도 그이의 온기로 이어진다

 

  조종되지 않는 전파로 밝아지는 빛은 없다

 

  2.

리모컨을 누르면 나타나는 화면 속에서 정해진 각본대로 살았지만 하우스 쇼라고 부르진 않았다

젖은 크리넥스티슈 몇 장의 아우성 같은 스포츠채널 바디게임은 몇 년 째 재방송되었고 텅 빈 하늘로 몽땅 날아간 재개발아파트 분양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찬바람에 덜컹거리는 단칸 월세방 깨진 유리창 사이로 시퍼런 번개가 내리쳤을 뿐,

 

  남편의 스트레스가 심해질수록 방안에 싱싱한 불알을 단 사내아이가 하나 둘 늘어갔을 뿐, 토란잎 밑에서 토실토실 커가는 땅 속의 유전자를 꺼내 환한 세상에 분양하는 일이 남았을 뿐,

 

  내 여성호르몬의 입덧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조옥엽 시인 / 침팬지 당신

 

 

  4,500만 년 전으로 돌아가 푸른 빙하 속에서 물장구치며 당신과 놀고 싶어요 얼음물을 뒤집어쓰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아 이제야 보이네요 역시 침팬지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유인원은 꼬리가 없죠 다람쥐와 비버 시냅시드 사족류도 보여요 공룡을 물어뜯다 쓰러진 바이퍼 보아, 다리달린 물고기 할아버지들도 보여요 그들을 보는 당신의 조상 침팬지가 저기, 생각에 잠겨 있듯

 

  당신과 갈라선 침팬지가 새끼들을 어르고 있어요

  당신과 침팬지의 염색체 차이는 거의 없죠

  당신은 98퍼센트의 침팬지

  침팬지는 98퍼센트의 당신

  당신 뼈 중 침팬지에게 없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뇌 모양도 같아요

 

  침팬지를 결단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당신

  하지만, 빛나는 갈색 눈을 지닌 아름다운 당신

  순천만 흑두루미처럼 고아한 당신

 

  2퍼센트의 목마름이 담긴 꼬리를 때 낸

  당신 침팬지

  침팬지 당신

 

 


 

 

조옥엽 시인 / 운명을 조절하는 유전자

 

 

  조립인형을 사달라고 조르던 아이의 손엔

  호메오 박스가 들려 있었죠

  부위 별 여덟 개 유전자 조각을 꺼내

  차근차근 조립하기 시작하는 아이,

  첫 번째 호메오를 꺼내 플라스틱 뼈대에 입을 만들고

  두 번째 호메오를 꺼내 귀를 붙이고

  코와 눈, 가슴, 팔, 다리, 엉덩이......

  한 사내아이가 이 나라에 탄생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 입이 갑자기 커지기 뭐예요

 

  낮엔 손바닥 메가폰을 쥔 개구쟁이마냥 악을 쓰며 골목을 뒤흔들더니,   밤이 오자 흑해함대의 사령관이 되어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호령하지 뭐예요 바다 속에선 잠수정이 자본주의의 수중무덤을 향해 어뢰를 쏘고, 하늘에 뜬 코브라 정찰기 프로펠러는 스모그 장막에 구멍을 냈어요 마하의 속도에서 쏟아지는 포탄이 땅을 뒤흔들면 60억 대군의 함성이 들려올 테죠

 

  운명을 조절하는 유전자도 있어요

  유전자가 명령하는 대로 무한대로 커가는 저 인형아이의 입 좀 보세요

  당분간 지구는 후회하는 방식의 입 하나가 되느라

  깨나 시끄러울 거예요

 

 


 

 

조옥엽 시인 / 헬라 세포주로 걸어가는 세상

 

 

  그녀는 죽었어요 아뇨 그녀는 아직도 도처에 살아 움직여요 1951년 전주 성가롤로 병원에서 자궁경부암으로 죽었지만 그녀 몸에서 채취한 세포는 이제 불멸의 세포가 되었어요 실험실에서 세포를 배양했죠 증식에 증식을 거듭한 세포는 다른 실험실의 페트리 접시를 독점해버렸지요 무한 대로 불어난 세포로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었고 마침내 외계까지 보내졌어요 전 세계에 있는 그녀의 세포 총량은 그녀의 몸무게의 400배가 넘어요 그녀의 뼈는 무덤 속에서 이제 거의 다 삭아가고 있을테지만 그녀의 암세포는 불멸의 세포가 되어 오늘도 증식에 증식을 거듭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세포가 그녀인가요 그녀가 세포의 일부분인가요 그녀는 살았나요, 죽었나요 아무래도 석연치 않죠 그렇다고 그녀가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요 삶과 죽음은 이렇게 한통속으로 완벽해요 그러니 우리는 가끔 죽은 자를 생각해야 돼요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생전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이 세상으로 되돌아오지요 죽은 자는 살아 있는 자,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 소중한 비디오테이프,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DVD, 언제 어디서나 재생 가능한 유에스비에요 스위치를 켜면 지금도 레테 강 건너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마당으로 걸어 들어오시지요 불멸의 세포주가 사는 이 세상엔 절지 않아도 좋을 다리들로 가득 찼어요 쿵쿵쿵 걸어 봐요 다함께,

 

 


 

 

조옥엽 시인 / 미니돼지 프로젝트

 

 

   나는 코가 발랑 까졌어 내가 코를 치켜들고 쫓아가면 너희들은 기겁하고 냄새 밖으로 달아나지 나에겐 화장실이 따로 없어 아무서나 일을 봐 그래서 늘 질척한 바닥에서 잠자고 먹고 숨 쉴 수밖에. 나는 비교적 참을성이 강한 편이야 주인이 방청소를 안 해 악취가 풍겨도 불평 없이 진창 속에서 뒹굴지 하지만 배고픈 것은 영 참을 수가 없어 끼니때가 다가오면 기를 쓰고 악다구니를 써대지 그런 억지에 단련이 되었을법한 주인은 지금도 만사 제처 놓고 내게 달려오지 참 순진한 인사지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난폭하게 주둥이를 돌려대. 주인은 구유에 발을 집어넣고 발광하는 나를 보고 곧 뺨이라도 후려칠 듯 눈을 부라리면서도 어김없이 밥을 가져오지 주둥이를 처박고 더러운 음식찌꺼기와 구정물을 숨넘어가듯 벌컥벌컥 들이켜 그런 나를 보며 주인집 아이들은 오만상을 찌푸리고 침을 뱉어대지 주인집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나는 보통명사 돼지,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실컷 구정물을 퍼 마시고나서 내가 할 일은 오직 하나 잠자기, 아무데나 등 붙이고 누워 실컷 퍼 자다보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어 약삭빠른 파리 놈들이 착 달라붙어 나를 괴롭히지만 뭐 그쯤이야 먹고 자고 자고 먹고 이게 내가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목적이야 움직일 때마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거대한 살덩이들, 유일한 나의 매력 포인트 하이힐이 몸무게를 못 견뎌 삐걱거릴 땐 난감하지만 먹을 수만 있다면 문제될 게 뭐겠어 이런 나를 경멸의 눈으로 보는 당신, 꽃잎 같은 입술과 조각상 같은 몸매로 24시간 내내 향기를 풍기는 당신, 당신 몸에 내 CD유전자를 끼워 넣는다고요? 이식한 내 심장을 가슴에 달고 거리를 활보하시겠다고요? 뭐 목숨을 연장할 수만 있다면 돼지 이미지쯤 달게 감수하신다고요?

 

 


 

조옥엽 시인

전남 구례에서 출생, 2010년 《애지》로 등단. 시집으로 『지하의 문사文士』(지혜사랑, 2016)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