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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성혜 시인 / 중독, 그치지 않는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3.

이성혜 시인 / 중독, 그치지 않는

 

 

파이를 먹어봐요, 갓 구워 육즙이 촉촉한

 

순결한 신부 맛이 있어요, 푸석푸석한 성직자 맛이 있구요

손만 대도 기름이 줄줄 흐르는 양치기 맛에 창자까지 썩은

관리 맛도 있어요 그린색 감도는 식료품 업자 맛은 어때요?

 

파이를 먹어봐요, 일류 ‘이발사’가 손질한

 

거품 이는 턱을 세세하게 밀고 여자들이 반할만한 향수를

부드럽게 바르지요 온몸이 만족으로 나른해져갈 때,

목을 따라 도는 빛 날, 스어걱

 

파이를 먹어봐요, 비쩍 마른 고양이 고기완 비교할 수 없는

 

오 분 전 키스를 나누던 입술 바삐 뛰어간 친구의 다리 살 목욕탕에서

밀어주던 이웃의 등 재판정에서 망치를 치던 판사의 뱃살 살아있는

재료들이 어우러져 곱게 갈린 매혹적인 맛,

 

파이를 먹어봐요

한번 맛보면 제 살을 갈아서라도 계속 먹고 싶어질 파이를,

 

 


 

 

이성혜 시인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찻물이 끓을 동안 정원이 보이는 이 소파에 앉아요

창 너머로 목매달기 알맞은 감나무가 보이지요?

종종 매달린 사체를 만지다 날아 들어온 바람,

사과 깎는 칼날에 스어~걱 베이기도 한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여러 사람의 기척과 흔적이 느껴진다구요?

홀로 사는 집이예요, 신경 쓰지 마시고

따끈한 민트차와 잘 익은 파이 한 조각 드세요

사과와 함께 오도독 씹히는 어린뼈가 아주 고소하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바닥에 주르르 흘러내린 묶을 수 없는 검붉은 리본과

벽지에 튀긴, 피가, 낙화하는 꽃잎처럼 화려하지요?

벽지 속을 날다 벽지 밖으로 빙글빙글 퍼져가는 날벌레의

군무, 나비의 건조한 날갯짓보다 황홀하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

 

술래의 노래가 들린다구요? 당신의 차례가 되었군요

우리 집에 잘 왔어요, 시간이 경계 잃고 떠도는

조용한 우리 집, 조용한 우리 집,

 

 


 

 

이성혜 시인 / 일주일 안에 귀여운 여잘 만날 거라네

 

 

담의 정수리 위로 햇살 한줌 똬리를 틀었네, 담장 아래 재빠르게 아님, 때를 놓친 장미 몇 송이 똬리 틀고 앉았네, 창살 이편 “으응, 장미” 대수롭지 않다는 흘림성, 담장과 창살 사이 두서없이 풀리는 생각을 엿보네

 

돈 없이 애정을 구걸하는 남자는 에이즈 보다 불결해

먼저 이별을 말할 기회를 놓치고 기분 쓰레기통이었지

커튼 없이 불 꺼진 창은 벌린 물고기 아가리 같았어

여자의 비명이, 달빛에 드러난 뱀 허리처럼 비늘로 번뜩였고

서~억 벌어지는 살점에선 꽃향기가 솟구쳤지

모가지를 똑 따 발바닥으로 비빈 꽃은 형편없이 너덜댔어

신경질적으로 터진 열매에선 눈 코 입이 흘러나왔지

 

꼬리와 갈기에 불붙은 당나귀처럼 불길이 날뛰었지

일렁이는 불길이 주술 실린 추장의 문신을 얼굴에 그려 넣었어

몸속에선 장미창이 끊임없는 그려대는 동심원,

전율과 흥분을 멈출 수 없었어

 

이곳을 떠나면 일주일 안에 귀여운 여잘 만날거라네, 눈물로 뿌리를 적셔 생존하는 사막식물 같은 여자, 자신의 영혼을 사줄 자를 간절히 찾는 여자, 나비처럼 누군가의 컬렉션에 추가되고 싶은 여자를.

 

 


 

 

이성혜 시인 / 카르페 디엠*

 

 

피곤으로 절럭거리는 구두뒤축에 말라빠진 해가 밟힌다

 

오늘의 일과를 끝내려합니다,

모두들 무채색 허기가 기다리는 곳으로 떠나주세요

 

어제가 새롭습니까, 내일이 달랐었습니까

 

아침이 아침을 낳는 타성을, 새로움이 존재했었던, 하던, 하는, 거라

믿는 건 아니시겠죠? 그까짓 희망 따윈 버려주세요

 

안경을 밀어 올리며 계절지난 잡지 너머, 평생 가꿔온 길이

어처구니없이 시시하다는 걸 깨닫는 겁니다

누군가 부추기면 음악소리 요란한 술집으로 몰려가는 겁니다

구두뒤축에 끌리는 생각처럼 일어섰다 스러지고, 세웠다

구겨지는 겁니다, 박힌 못처럼 홀로 부식하고 헐거워 가는 겁니다

눈앞으로 스쳐가는 삶을 묵묵히 바라봐 주는 겁니다

억울해 하지 말고 입을 열 수 있을 때 작별의 손을 흔들어

두는 겁니다

 

붉게, 잿빛과 보라색으로 몸체를 불려가던 하늘이 경계를 잃는다

 

*카르페 디엠: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

 

-2012. 계간《예술가》가을호. 이 시인을 묻는다.

 

 


 

 

이성혜 시인 / 신을 잃어버렸어요

 

 

 이유 모를 총질과 아비규환에서 도망쳤는데요 맨발이네요 무한 앞에 방향 잃고 여기-저기 신을 찾아 헤매요 신이 신을 낳고 낳아 내가 바로 그 신이라 나서는 신 많은데 신이 없네요 조악한 모양 싸구려 재질 엉성한 바느질 가짜-모조-짝퉁, 내가 찾는 신은 디자인 재질 바느질이 최상급, 장인이 한 땀 한 땀 만든 유일한 신! 이라니까요 상하지도 더럽혀지지도 않는 발 때문에 해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신을 찾아 헤매요 왈패들 왈짜를 막아주는 주막집 주모 추락하려는 절벽에서 손을 내미는 청동활 남자 토기에 물을 떠주는 여자, 원치 않는 구원들이 신 찾기를 끝낼 수 없게 하네요 때로는 강풍에 돛단배처럼 휘리릭 대서양으로 나아가고요 때로는 잠자는 지중해시간에 묶이기도 하고요 중력 잃은 허공에 떠있기도 하면서 근원에서 황혼토록 신을 찾아 신고-벗고! 드디어 닮은 신을 찾았는데 작아요 신 찾기를 끝내려 꾸-욱 밀어 넣었어요 어, 신이 발에 맞춰 자라나네요 무얼 찾아 헤맨 걸까요? 신에 발만 넣으면 원하는 대로 편하게 맞춰주는 차안此岸인데요!

 

 


 

 

이성혜 시인 / 그런 날들이 지나간다

 

 

사루비아 사루비아 샐비어라 부를까, 꽃대 내민 여린 깨꽃

 

인혁당과 정수장학회 건이 박후보를 수렁으로 부른다

안후보가, 단일화 없이 무소의 뿔처럼 가겠다, 선언해도,

일반 여론이 文─安 후보 단일화를 기정사실로 여긴다

미사일 사정거리가 북한 전역과 일본서쪽 절반이 들어가는

800킬로 연장─무제한이면 세계정복이다

전세가 집값보다 비싼 지역 속출하고, 노후가 흔들린다

삼성신입고졸여직원 132억 로또 소문 대박!

북한귀순병 하나가 별들을 쥐락펴락─노크소리 효과다

 

사루비아 사루비아 샐비어도 괜찮아, 낙뢰 맞은 어린 깨꽃

 

적조피해 지역 양식장 어민이 청정바다로 치어 방류─살아있으라

음악감독 언니가 청부살인 혐의? 여자 제임스 본드라고?

구글이 국내 티브이 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혀가고

애플의 특허횡포에 자국 언론마저 생태계 독식행위로 비난한다

K-Pap과 말춤이 세계를 강타해도, 노벨상 소식 들리지 않네

‘속도는 경쟁자에게 위협적인 무기지만 자기파괴적 요소가 있다.’

기사에 동감하며 그런-그런 날들이 지나는 사이,

평범한 오빠,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들이 뭉개고 있네요─깨꽃

 

사루비아 사루비아 샐비어라 부를까, 뭉개져도 싱싱할 이름 깨꽃

 

(2012<시와세계>겨울호.)

 

 


 

 

이성혜 시인 / 물박물관에서 물을 주지 않는다

 

 

자-자-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득한 옆얼굴 보이지 말고 말을

해봐요, 낯선 곳에서 훌훌 털어놔요

 

기억범주 안에 모든 것이던 그분을 놓아버렸어요

정물화 속 그림처럼 시간이 증발해 버렸어요

움푹 파인 가슴에서 기억들이, 기억들이 느릿느릿 흩어져요

허방 같은 내장이 온몸을 친친 감고 삼키려 들어요

할 일이, 아니죠,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도 아니죠, 할 줄 아는 일이…

눈만 뜨면 걸었어요, 서 있지 않았어요, 계속 걸었어요

마음 없는 몸! 그 마음 없는 몸 말이예요

 

혓바닥이, 다리가, 노랗게 뒤툴거리며 돌고, 돌고, 돌고

40년 만에 찾아온 폭발할 것 같은 폭염의 폭염이죠

 

어둠이 집어삼킨 물박물관을 찾았어요

입구를 서성이다 장식항아리 꼭지를 돌리자 물이 나와요

망설였죠, 마셔도 괜찮을까? 썩지 않았을까?

손을 씻었어요, 손수건에 물을 묻혀 얼굴과 목을 닦았어요

다시 적셔 겨드랑이와 팔과 다리를 닦았어요, 마음 없는 몸!

 

자-자-자, 계속 걸어요, 쉬지 말고 걸어요, 누군가 반쯤 얼린

물병을 줄 때까지, 멈추지 말자

 

 


 

 

이성혜 시인 / 비상, 활짝 피는 붉음

 

 

공룡고기를 물고 지글지글 숯불 위를 건너는 집게와 가위의 설익음, 붉다

 

하루를 위해 검은 웅덩이를 건너는 하얀 맨발의 맥박소리, 붉다

 

녹슨바다를 건너며 거미가 뽑아내는 로드맵, 붉다

 

손목을 잡아-끌어 학교로 돌려보낸 아버지

흐린 불빛 정류장에

손목을 먹고 죄의식이 무성하게 자라난 거,

 

불완전한 언어-출렁이는 언어-건너뛸 수 없는 언어

돌아가고 싶었어요,

둥글게 몸을 말아 따스한 근원으로,

 

좌─악 펼쳐진 바닥을 향해 비상, 비상하다

기다리지 마세요,

아버지를 위해 돌아올 공룡을 멸종 시켰어요

 

고요히 치러지는 진흙의 화형식, 태어나지 못할 메아리, 붉다

 

기다리는 인류는 올 것인가? 발치에 쌓이는 손목, 붉다

 

(2012년. 계간《시선》겨울호.)

 

 


 

이성혜 시인

서울에서 출생. 국문학사. 2010년 계간 《시와 정신》가을호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