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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루 시인 / 무의미한 고통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5.

김루 시인 / 무의미한 고통

- 종달새 까부는 밀밭*

 

 

나풀거리는 붉은 몸짓

누굴 향한 몸짓 인가요

 

혼자 너무 오래 피었나 봐요

 

구멍 뚫린 바람은 어제를 드나드는데

밤낮없이 끌질한

어제의 손가락이 벼랑으로 떨어지면

발톱에서 귀까지 파래지는 밤이에요

 

어떤 바람을 타고 날아야

먼 곳의 집이 따뜻해질까요

 

들녘에 앉아 집을 스케치해요

봄여름가을봄여름가을

춥지 않은 지구면 좋겠어요

 

얼어버린 꽃이 수두룩이에요

 

작별하고

작별하고

겨울을 벗어나면

어떤 색으로 싹을 틔울 수 있을지

 

붉은 손가락이 돌아온 것도 아닌데

금이 간 어제의 집은 아직 흔들리는데

 

*고흐의 그림

 

격월간『현대시학』 2020년 5~6월 발표

 

 


 

 

김루 시인 / 1997 고흐의 카페

 

 

바람의 귀를 열고 잠에서 깨면 무덤이었어

 

노란 찻잔 속에

노란해바라기가 말을 하기 시작했지

 

종일 누워

종일 누워만 있을 뿐인데

바람은 시들어 갔어

 

비둘기가 구구구구

말을 잃고 쓰러진 시간은 11시 13분

 

꽃비가 내렸지 이 거리에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지는

해바라기는 태양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힙합의 청바지로 봄은 오고 있겠지

 

우산을 써도

저녁 빗소리는 막을 수 없고

매캐한 연기로

뒤집어진 눈꺼풀을 그때 우린 사랑했었지

 

잠속 세상이 무덤인 줄 모르고

벽속에 자신을 가둔 해바라기가 웃는다

 

다리가 하나뿐인 해바라기

 

태양을 향해 걷는다

 

사화집『꽃』(한국시인협회, 2021) 중에서

 

 


 

김루 시인

2010년 《현대시학》 21회 신인성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