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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재섭 시인 / 석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5.

이재섭 시인 / 석탄

 

 

내 몸 속에는 발화점이 있다.

죽은 것들의 사체에 몰려온 세상의 모든 음기가 응축된

함몰의 최후 거점.

탄화된 몸 어느 위치인가에 그 핵이 있다.

 

음습한 기운의 농축일 뿐인데

세상 잇속 밝은 사내의 곡괭이에 찍혀 파르르 떨고 나면

피부는 방금 그물에 포획된 고등어 비늘처럼 민감해진다.

내 몸 어디에 외계의 불씨를 간절히 기다리는 발화점이 있다.

 

나는 스스로 타오르지 못한다.

뜨거운 양기가 내 몸의 깊은 지점에 닿을 때에야

몸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른다.

비 자발성 오르가즘, 피학대증후군.

 

어떤 사내가 내 몸 깊이 곡괭이를 대 줄 것인가.

누가 내 숙명의 발화점까지 거침없이 다가올 것인가.

세상의 음기로 탄화된 몸이 남김없이 타올라

하얀 연기로 풀어질 그날을 기다린다.

 

 


 

 

이재섭 시인 / 참 사랑은 가까이 머문다

 

 

멀리 있는 숲은 아름답다.

그 숲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거기 가시덤불이 있다.

엉겅퀴에 긁히고 송층이에 물린다.

 

멀리 있는 바다는 신비롭다.

그 바다는 꿈이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거기 노도가 있다.

그 곳에선 때로 배가 전복된다.

 

멀리 있는 사람은 향기롭다.

그래서 그리움이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그에겐 가시가 있다.

같이 살면 때로 생살이 찔리고 피가 난다.

 

그렇다.

가까이 있어주는 사랑이 큰 사랑이다.

가까이서 견뎌주는 사랑이 참 사랑이다.

 

 


 

이재섭 시인

1957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 성균관대와 가천대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음. 영국 유학 켄트대학에서 사회정책 박사과정 수료. 2015년 계간《시선》으로 시 등단. 시집으로 『석탄』이 있음. 포에트리 슬램 문학회 부회장. 상록포엠 문학회 회장. 사회정책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