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섭 시인 / 석탄
내 몸 속에는 발화점이 있다. 죽은 것들의 사체에 몰려온 세상의 모든 음기가 응축된 함몰의 최후 거점. 탄화된 몸 어느 위치인가에 그 핵이 있다.
음습한 기운의 농축일 뿐인데 세상 잇속 밝은 사내의 곡괭이에 찍혀 파르르 떨고 나면 피부는 방금 그물에 포획된 고등어 비늘처럼 민감해진다. 내 몸 어디에 외계의 불씨를 간절히 기다리는 발화점이 있다.
나는 스스로 타오르지 못한다. 뜨거운 양기가 내 몸의 깊은 지점에 닿을 때에야 몸은 걷잡을 수 없는 불길로 타오른다. 비 자발성 오르가즘, 피학대증후군.
어떤 사내가 내 몸 깊이 곡괭이를 대 줄 것인가. 누가 내 숙명의 발화점까지 거침없이 다가올 것인가. 세상의 음기로 탄화된 몸이 남김없이 타올라 하얀 연기로 풀어질 그날을 기다린다.
이재섭 시인 / 참 사랑은 가까이 머문다
멀리 있는 숲은 아름답다. 그 숲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거기 가시덤불이 있다. 엉겅퀴에 긁히고 송층이에 물린다.
멀리 있는 바다는 신비롭다. 그 바다는 꿈이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거기 노도가 있다. 그 곳에선 때로 배가 전복된다.
멀리 있는 사람은 향기롭다. 그래서 그리움이 된다. 하지만, 가까이 가면 그에겐 가시가 있다. 같이 살면 때로 생살이 찔리고 피가 난다.
그렇다. 가까이 있어주는 사랑이 큰 사랑이다. 가까이서 견뎌주는 사랑이 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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