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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록 시인 / 정말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5.

이정록 시인 / 정말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

참 빨랐지

그 양반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년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이정록 시인 / 생(生)

 

 

느티나무는 그늘을 낳고 백일홍나무는 햇살을 낳는다.

 

느티나무는 마을로 가고 백일홍나무는 무덤으로 간다.

 

느티나무에서 백일홍나무까지 파란만장, 나비가 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년

 

 


 

이정록 시인

1964년, 충남 홍성군 출생. 공주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 수료.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혈거시대' 당선 데뷔. 1994년 첫시집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1996년 <풋사과의 주름살>. 1999년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2001년 <제비꽃 여인숙>. 천안청수고등학교 교사. 윤동주문학대상. 2017.7 제5회 박재삼문학상. 2002 제13회 김달진 문학상 시부문. 2001 제2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만해문예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