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시인 / 얼레지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한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김선우 시인 / 대천바다 물 밀리듯 큰물이야 거꾸로 타는 은행나무야
그렇게 오는 사랑 있네 첫눈에 반하는 불길 같은 거 말고 사귈까 어쩔까 그런 재재한 거 말고 보고 지고 그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 온몸의 물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진액 오른 황금빛 잎사귀들 마지막 물기 몰아 천지사방 물 밀어가듯
몸이 물처럼 마음도 그렇게 너의 영혼인 내 몸도 그렇게
김선우 시인 / 토담 아래 비석치기 할라치면
악아, 놀던 돌은 제자리에 두거라 남새밭 매던 할머니 원추리 꽃 노랗게 고왔더랬습니다. 뜨건 개숫물 함부로 버리면 땅속 미물들이 죽는단다 뒤안길 돌던 하얀 가르마 햇귀 곱게 남실거렸구요.
-시 ‘할머니의 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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