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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정국 시인 / 번역자에게 경의를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6.

오정국 시인 / 번역자에게 경의를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서

개와 늑대를 구분 지어야 한다

 

'이미'와 '아직'의 분기점을

명확하게 일러줘야 한다

 

언어의 균열과 공백, 간극을 헤집는

당신의 희고 긴 손가락은

 

문장의 형태 안에 인간의 형상을 채워 넣고

인간의 형상을 문장으로 바꿔놓는다

 

당신이 옮겨놓은 말없음표처럼

시(詩)는 우리와 함께 사는

영원히 텅 빈 공간

 

파블로 네루다의

유전처럼 불타는 월요일은

찌그러진 바퀴처럼* 굴러갔고,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나

한 번도 그렇게 이뤄진 적 없었기에

결국 카프카는 픽션의 세계로 되돌아갔지만

 

당신은

문장을 옮기면서

문맥을 숨 쉬고, 문장처럼 일하면서

문맥의 굴곡을 겪어낸다

 

그리하여

묘비 위의 고양이가

내 머리맡의 책상으로 뛰어 내리고

시에스타의 혼곤한 꿈이 눈앞을 지나간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산책」.

 

계간 『시와 사상』 2021년 가을호 발표

 

 


 

 

오정국 시인 / 나는 오늘도 다리 밑에서

 

 

머리 위로 밤의 철교가 지나가듯이

객실의 불빛이 흘러가듯이

문득 그런 생이 있었던 거다

 

그럴 리 없다고

이럴 순 없다고

나는 오늘도 다리 밑을 떠도는데

 

누런 물 간다 돌멩이 구른다 나무뿌리 뽑힌다 산허리 무너진다 붉은 무덤 흐른다 두개골 글러간다 공중의 햇덩이, 강줄기를 타고 간다

 

장마철의 흙모래를 입에 물고 싶은 날

하릴없는 옛 노래를 흥얼거리면

 

방죽의 꽃을 차르르륵 훑고 가는 여자1

자전거 바큇살을 번쩍거리는 남자2

개 목줄에 끌려가는 여자3

오늘 하루의 엑스트라가 지나가고

 

강물이 옆구리를 친다 이미 용서받은 생애가

그 어디 있겠냐고

 

강둑의 돌은

철망이 끊어질 때까지

땡볕의 스크럼을 견뎌내고 있다

 

머리 위엔 철제 난간이, 전봇대가, 피뢰침이, 차바퀴가

 

격월간 『현대시학』 2020년 9~10월호 발표

 

 


 

오정국 시인

198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내가 밀어낸 물결』,『멀리서 오는 것들』,『파묻힌 얼굴』,『눈먼 자의 동쪽』과 시론집『현대시 창작시론-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 등 출간.  제12회 지훈문학상, 제7회 이형기문학상 수상. 현재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