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국 시인 / 번역자에게 경의를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서 개와 늑대를 구분 지어야 한다
'이미'와 '아직'의 분기점을 명확하게 일러줘야 한다
언어의 균열과 공백, 간극을 헤집는 당신의 희고 긴 손가락은
문장의 형태 안에 인간의 형상을 채워 넣고 인간의 형상을 문장으로 바꿔놓는다
당신이 옮겨놓은 말없음표처럼 시(詩)는 우리와 함께 사는 영원히 텅 빈 공간
파블로 네루다의 유전처럼 불타는 월요일은 찌그러진 바퀴처럼* 굴러갔고,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나 한 번도 그렇게 이뤄진 적 없었기에 결국 카프카는 픽션의 세계로 되돌아갔지만
당신은 문장을 옮기면서 문맥을 숨 쉬고, 문장처럼 일하면서 문맥의 굴곡을 겪어낸다
그리하여 묘비 위의 고양이가 내 머리맡의 책상으로 뛰어 내리고 시에스타의 혼곤한 꿈이 눈앞을 지나간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산책」.
계간 『시와 사상』 2021년 가을호 발표
오정국 시인 / 나는 오늘도 다리 밑에서
머리 위로 밤의 철교가 지나가듯이 객실의 불빛이 흘러가듯이 문득 그런 생이 있었던 거다
그럴 리 없다고 이럴 순 없다고 나는 오늘도 다리 밑을 떠도는데
누런 물 간다 돌멩이 구른다 나무뿌리 뽑힌다 산허리 무너진다 붉은 무덤 흐른다 두개골 글러간다 공중의 햇덩이, 강줄기를 타고 간다
장마철의 흙모래를 입에 물고 싶은 날 하릴없는 옛 노래를 흥얼거리면
방죽의 꽃을 차르르륵 훑고 가는 여자1 자전거 바큇살을 번쩍거리는 남자2 개 목줄에 끌려가는 여자3 오늘 하루의 엑스트라가 지나가고
강물이 옆구리를 친다 이미 용서받은 생애가 그 어디 있겠냐고
강둑의 돌은 철망이 끊어질 때까지 땡볕의 스크럼을 견뎌내고 있다
머리 위엔 철제 난간이, 전봇대가, 피뢰침이, 차바퀴가
격월간 『현대시학』 2020년 9~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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