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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이엽 시인 / 제3자(第3者)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6.

장이엽 시인 / 제3자(第3者)

 

 

하루살이가 불빛을 향해 모여들면서

거미는 줄을 치기 시작했다.

거미줄에 잠자리가 걸려들고

나비가 잡혔다.

매미도 달랑거렸다.

 

불빛과 무관하던 새들이 행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벽기둥에 바짝 다가서기 위해 파득거리다가

거미를 낚아채거나

베란다 난간에 앉아 둥글게 말려 있는 먹잇감을

콕 찍어 먹기도 했다

 

내가 하는 짓이란 발길을 옮기며 주변을 맴도는 일

창 안쪽 어둠 속에서

하루살이와 거미와 잠자리와 나비와 새의 일순간을 쳐다보는 일

 

막대기를 휘둘러 거미줄을 걷어내지 않았고

발버둥치는 나비의 몸짓도 외면했으며

저녁이면 어김없이 환하게 불빛을 밝혀두었으므로

어디에도 第3者가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살이가 모여드는 동안

거미가 줄을 치는 동안

잠자리나비매미가 덫에 걸리는 동안

새들이 방향을 바꾸지 않는 동안

정확히 말해

불빛으로 새의 성장에 관여하는 동안

 

새는

유리창 안쪽의 눈빛을 참고하고 있었을까?

 

자신을 사육해 어디에 쓰려는지

나를 조련시켜 어디에 쓸 것인지...... .

 

 


 

 

장이엽 시인 / 나, 가는 길

 

 

폭설이 잦았던 겨우내

詩人과 是認사이에서

애간장을 태우다가

며칠 동안 血便을 보고 말았다.

처음부터 꼼수 따위는 없었다.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곰이

쑥과 마늘만 먹으며 백일을 견뎠다는 신화가 떠올랐던 건

詩集食口로 살려거든

눈 감고 삼 년 귀 막고 삼 년 입 다물고 삼 년

엎드려 정진하라는 말씀이었던 것.

 

오감은 깨어 있었으되

온 마음으로 더듬지 못했던 것인데

 

입이 성하면

손이 게을러지고

눈이 밝으면

귀가 어두워지기 마련

 

동굴에서 살아남는 물고기가 되기 위해

눈을 찌르리라.

허공을 가르는 새가 되기 위해

뼈를 비우리라.

 

나가는 길은 없다

오직

나, 가는 길이 있을 뿐!

 

 


 

 

장이엽 시인 / 모서리

 

 

모서리라는 말은

보이는 것에 대한 한계점이다

 

벽과 벽이 만나는 경계여서

내 눈이 다른 곳의 사물과 소통하지 못할 때

기어이 돌아가서야 만날 수 있는 미래다

 

다면체의 전개도를 펼치자

나는 종선을 탄 어부가 되어

어스름한 저녁바다로 밀려간다

출렁이는 잔물결너머

아득한 수평선이 어둠에 묻혀 가는데

날렵한 각도 앞에서 머뭇거릴 때보다

숨겨진 비밀에 콩닥이던 가슴보다

좀 더 낯선 두려움과 통증이 정수리로 쏠리면서

왜 자꾸 눈물이 나려하는가?

 

정면은 시선이 닿는 곳에서 시작한다

수없이 많은 모서리 속에서

물고기처럼 유영하기

뒤돌아보기 없기

헛걸음에 상심하지 앟기

단념을 깨우는 채찍에 두려워하지 않기

 

나는 지금 투명한 기둥에 문을 만들고

모서리 하나를 통과하고 있다

 

 


 

 

장이엽 시인 / 날아라, 탁자

 

 

바위산을 오르내리는 시시포스가 있었다.

머물지 못하는 건 운명이다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가속을 붙인 무게는 다시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무게를 더한다.

그러니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하는 일은

그에게만 선고된 형벌이 아니다

 

바닥에 엎드려 네 귀를 세우는 탁자야!

엿듣지 마라.

굽힌 등을 펴려고

돌아눕지 말아라.

함부로 말하지 마라.

흔들리지 말아라.

턱밑에 불거진 근육의 긴장을 풀지 마라.

혀 속에 비밀을 간직한 벙어리가 되어라.

 

모서리 세우고 덤비지 마라.

쉽게 다가서지 말고

멀어지지도 말아라.

머리에 이지 못하거든 가슴에 품어라.

발목에 힘을 모으고 수평선을 그려보는 너,

 

시시포스를 대신한 침묵의 등불을 꺼도 좋다면

지평과 나란한 평행을 벗어나

23.5도의 기울기를 디디고 솟구쳐 날아올라라.

 

 


 

 

장이엽 시인 / 구구단의 1단이 되고 싶다

 

 

나는 구구단의 1단이 되고 싶다

어떤 수를 곱해도 그 수 자신이 되는

구구단의 1단이 되고 싶다

어떤 수를 곱하는 0이 되어버리는 0은 싫어

곱하는 대로 쑥 쑥 커버리는 3,4,5단은 더욱 싫어

그저 곱하는 만큼 보여주는 1단이 좋으니

내게 들어와 스미는 1단처럼 명랑한 암송이 좋으니

나는 1단이 되련다.

 

구구단을 외우는 아이야!

속수무책으로 커지는 숫자 앞에서 기가 죽는 아이야!

무럭무럭 자라나는 숫자 앞에서 어깨 움츠리는 아이야!

지구를 걸어가는 것은

한 발 한 발 헤아리는 일도 필요 없는 짓인데

18단, 19단을 외워보려고

눈썹을 곤두세우는 아이야!

지금은 다만, 물결을 읽어야 할 때.

그 수 자신이 되는 1단과 뛰어놀아야 할 때.

발밑 그림자와 손잡아야 할 때.

 

 


 

장이엽 시인

1968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원광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2009년 《애지》봄호 신인문학상에 모서리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2011~2012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분야 차세대예술인력집중육성지원(AYAF) 대상자선정, 창작지원금 수혜. 시집으로 『삐뚤어질 테다』(2013, 지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