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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연향 시인 / 초원의 빛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6.

조연향 시인 / 초원의 빛

 

 

별들이 기둥과 벽을 세워 천막을 치고

난롯불 피워놓았네

장작은 장미꽃처럼 불타오르다 쉬이 사그라지고 말아

게 눈 감추듯 피 냄새를 감추며 짐승의 살점을 뜯을 때,

마소들의 울음소리가

소리 없이 검은 산등성이를 넘고 있었네

이 세상에, 허기보다 진한 것은

피도 아니고, 그 무엇도 없어라

오늘 저녁 만찬에는 또 얼마나 뜻 모르는 희생양

내가 살고 네가 죽으니

어느 비탈진 후생, 또 우리 젖은 눈망울로 다시 만나서

너를 살리려 내 피를 뿌릴 것이니

문득 선법의 한 가르침 떠오르네

생명이란 실체가 없어, 살점을 태우는 저 장작불의 연기처럼

연기에 있다고 하였으나,

너와 나 결코 없는 것이라고 비웃어보네

다만,

지금 여기 증명할 수 있는 별조차 깜박거리는 불빛일 뿐

끌어당기지 않아도 밤하늘은 캄캄한 게르 지붕을 덮네

 

-『바이칼에서 몽골까지 열흘』, 책만드는집, 2020.

 

 


 

 

조연향 시인 / 불타는 창문

 

 

서울로 돌아오면서 올려다본 창문 위의 창문

 

창문이 창문을 타고 오르지도 내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불길이 더 번지기 전, 불을 끄고

창문은 밤하늘을 닫고 집을 잠재워야지

 

불이 꺼지고 커튼이 닫혀도 수박 속처럼

붉은 속살이 흘러넘치는 집

 

휴게소에서 먹었던 설렁탕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활짝 창문을 열어 다 토하고 싶은데 내장을 다 토해내고 싶은데

사다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밤 구름

 

서늘한 달빛이 내 마음의 불길을 건너가네

 

얼어붙은 시간이 활활 타오르는 창문 위의 창문

 

 


 

 

조연향 시인 / 꽃이 꽃을 건너는 동안황매실

 

 

깊은 산골입니다 눈 내리고 산그늘이 지면

꽃잎마다

 

푸른 잎의 우산을 받쳐도 온몸이 흠씬 젖습니다

초인의 눈 속으로 운석이 흘러드는 밤

뻐꾹, 구름이 울어대고 마을에 또 무슨 일 터졌나요

 

천둥이 깨지고 바닷물 뒤집혀도 호랑이 이빨 자국 지우듯 정신 차려 팔랑입니다

수상한 그늘이 펄럭이고, 강물이 넘쳐흐르는 동안

제 생을 익히듯 꽃은 속내를 익힐 뿐입니다

 

꽃이 꽃을 건너는 동안,

새콤한 속내를 생각하는 동안

 

어느 날은 누군가 매화꽃 그늘에 와서 밀어를 흘리고 가고

또 어느 날은 얼굴 없는 시체가 썩어 문드러진다고

새들이 천둥 속에서 그렇게 퍼덕거렸던가요

배꼽부터 물들이는 돌연변이의 봄밤도 미친 명약입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꽃열매인들 나뭇가지에 앉아

 

땅의 일들을 못 보았겠습니까

누가 저 꽃벌레를 살해했는지 꽃벌레가 스스로 목을 매었는지

 

번개가 지나도 바람은 묵비권입니다 알 수 없는 염병이 홀연히 산비탈을 휘돌아가고,

풀리지 않는 의문처럼 달빛은 원시림입니다

끝내 가보지 못해도 눈에 선한 그 마을의 서사가 새콤하게 한 문장으로 익었습니다

 

 


 

 

조연향 시인 / 토네이도 딸기

 

 

지평선이 몸을 풀고 누워 있네

어바나 샴페인 대형마트에 딸기 사러 가는 길

내 여섯 살 어린 입맛이 떠올랐네

 

코끝을 물들이며 그리운 딸기 여기서 훌쩍이고 있었는지,

 

흑인과 백인 가랑이를 피해

고르고 골랐던 패트 속의 겨울딸기, 여기저기 까만 돌기가 돋고 살갗이 이리도 부풀어 있었네

 

이상한 나라 엘리스처럼 이상한 딸기를 품고 오는 길

며칠을 굶은 바리데기처럼 헐렁헐렁 그림자 이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

핏덩이를 낳고

딸기 먹고 싶다는 딸에게 가고 있나

 

내 안의 핏덩이 좀처럼 굳지 않고 노을처럼 흘러내리고

일리노이 지평선의 옥수숫대를 삼키며 몰려가는 토네이도

자 먹어 봐,

부풀면서 몸의 고통이 달콤해진 열매를,

지평선 여기저기 새들이 갈겨놓은 붉은 반점을

 

혀 위에 가만히 올려 보았나

 

홀로 만삭이었던 너의 입맛과

한때 만삭이었던 내 기억 속으로 모래바람이 불어가네

 

내 딸은 천이백 살 거듭 환생한 나의 엄마, 토네이도를 품은 딸기를 나에게 건네주는 사이

꽃잎 자국이 점점점 번져가는 지평선

 

 


 

조연향 시인

경북 영천에서 출생, 경희대 대학원 국어국문과 박사과정 졸업. 1994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와2000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제1초소 새들 날아가다』, 『오목눈숲새 이야기』 『토네이토 딸기』등과 연구서 『김소월 백석 민속성 연구』가 있음.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 강사. 육군사관학교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