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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외자 시인 / 미술시간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6.

천외자 시인 / 미술시간

 

 

너에게로 가는 내 마음의 비좁은 길목에는 폐 염전이 가로놓여 있다

갈대가 무성한 소금밭에 들어갔다가 자주 길을 잃어버린다

이 곳에 길을 만들고 길을 따라 사과나무를 심어보려고 도화지에 짙푸른 색을 칠한다

자욱하게 사과 꽃이 피면 네가 더 멀어질까 두렵다

가위를 들고 도화지를 반으로 접어서 자른다

넓은 개펄이 바닥에 떨어지고 너와 나는 한 발자국이다

푸른 사과나무 잎이 교실 바닥에서 시든다

창 밖으로 염전이 바라보이는 오학년 사반 교실, 미술시간의 언저리에서 길은 짧아지기도 길어지기도 하며 가끔 사과 꽃이 순식간에 피었다가 지기도 한다

넓은 길을 싹둑싹둑 자르는 가위소리가 어디서 들려왔는지 아이들은 모른다

나는 어떤 길도 믿지 않는다

뚜껑이 반쯤 열린 수채물감 속에서 길은 흘러내리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

길이 있어도…… 영원히 나는 너에게로는 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시향 <2007년 봄호 재수록>

 

 


 

 

천외자 시인 / 루드베키아

 

 

그는 나오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서 쉼보르스카 시집을 꺼낸다

책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삼십분만 소리 죽여 울다가 일어설 것이다

루드베키아가 피어있는 간이역

서로 떨어진 꽃잎이 제각각 바라보는 방향으로

이별은 역사의 빈 공터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시들고 있다

누군가 새롭게 만들고 있다

만남을 잃어버린 역사에서 모든 것은 이별의 진행 방향이다

기차가 떠난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출구로 나가는 사람들 속에 내가 없어도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다

의자 위에는 바람이 시든 장미 다발처럼 놓이고

나는 선로 건너편 루드베키아 꽃밭 속으로……

시베리아로, 안데스로, 히말라야로, 실크로드로……

샛노란 꽃잎의 길이 열린다

이 많은 길을 누가 만들었을까

카테리니행 기차는 여덟시에 떠났다네

또 다른 루드베키아 한 송이가 새로 핀다

하나가 아니고 유일한 것도 아니고

이별은 일상이 되고

이제 얼굴을 책으로 가리고 혼자 울지 않아도 된다

 

《열린시학》 2007년 가을호

 

 


 

 

천외자 시인 / 카라

 

 

송내역 부근 허름한 꽃집에서 샀다

견고한 감옥 두 송이

연보랏빛 꽃대를 타고 깊숙이 손을 집어넣는다

물살을 만지고

물에 묻은 푸른 시간을 움켜잡고......

내가 이 강기슭까지 오는데 몇 년이나 걸렸나?

돌아갈 길을 지운

나는 견고한 감옥이다

 

나는 네 바닥에서 몇 번이고 죽을 수 있다

겨울 저녁

착고着錮가 너무 무겁고 차다

 

 


 

천외자 시인

경북 안동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시현실》을 통해 등단. 현재 소래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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