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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명란 시인 /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16.

최명란 시인 /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최명란 시인 / 보도블럭 까는 청년

 

 

달밤에 한 청년이 무릎을 끓고 광화문 보도블럭을 깔고 있다

담뱃불 구멍이 숭숭 난 낡은 청바지를 입고

망치로 톡톡 길을 때리며 반듯하게 길의 육체와 정신을 만들고 있다

서울시청 하늘에 높이 뜬 보름달 외에는 아무도 그를 비추지 않는다

감옥에서 나와 어머니가 해주시는 새벽의 뜨거운 밥을 먹다가

스스로 찾아 나선 길이 길을 만든 일이었다

청년은 잠 못 이루던 감옥에서도 늘 길을 만들고 있었으므로

이제 조심조심 그 길을 내려놓고 모래를 깔고 경계석을 갈라놓고

가로 세로 벽돌조각을 맞추어 다시는 허물어지지 않을 서울의 길을 만든다

함께 시위하던 시민들이 무심히 발끝으로 그를 보고 지나간다

이제는 전경버스를 불태우고 너를 향해 보도블럭을 깨어 던지지 않으리라

폭력은 길을 부수지만 그래도 화해는 길을 만든다

때로는 길도 돌아서서 어깨를 들먹이며 울먹일 때가 있다

거리의 떨어진 은행잎들이 달려와 우수수 청년을 껴안아주고 돌아간다

은행잎을 따라가던 길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청계천 물길을 바라본다

물길 위에 사람들은 저마다 무량수전 하나씩 지었다 부수는 것일까

밟아도 밟아도 돋아나는 야생의 풀뿌리를 위하여

새벽달이 질 때까지 청년은 무릎을 꿇고

보도블럭 틈새마다 한 움큼씩 흙과 사랑을 집어넣는다

봄이 오면 광화문 보도블럭마다 노랗게 민들레가 피리라

거리의 미소 띤 발자국마다 쥐오줌풀도 활짝 피어나리라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중에서

 

 


 

 

최명란 시인 / 분만실까지

 

 

내 생전 이보다 더 따뜻한 연애가 있었을까

뒤틀리는 아랫도리 분만실에 겨우 세우고 파르르 떠는 내 어깨를

그 의사의 하얀 팔이 감쌌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나는 열 달 내내

출산을 위해 챙겨 두었던 가방을 들고 혼자 분만실까지 왔다

눈만 흘겨도 애를 배는가

그 그믐밤 꼭 한 번 밤꽃 아래 잠시 입 벌리고 누웠을 뿐인데

어둠 속에서 사내도 없이 달의 배는 점점 커져갔다

그날 밤 강 건너 깜빡이는 담뱃불을 따라가지만 않았어도……

살면서 내가 선택한 그 많은 일들

기어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소리 없이 운 세월 뒤로

소등된 골목에 새벽별만이 찬 빛을 뿜어내고 있다

그간 밖에서 있었던 일 백의의 의사에게 모두 일러바치고

서러웠어요 여름날 매미처럼 소리 내어 울고 싶었어요

서장대를 넘어가던 촉석루 새벽달이 남강의 깊은 물속을 들여다본다

까맣게 타버린 내 야윈 가슴과

논개의 열 가락지 사이사이로 살찐 물고기들이 어렵사리 오고 간다

남강의 새벽공기는 차고 물결은 푸르러 차라리 검다

기울던 새벽달이 다시 촉석루 정수리에 초승달로 떠올라도

누가 어찌

표나지 않는 내 아랫도리의 죄를 물을 것인가

 

<다층> 겨울호

 

 


 

 

최명란 시인 /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었고

서로를 갉아먹는 쇠와 쇠 사이의

녹 같은 연애를 했다

 

역사와 정치와 사랑과 관계없이

 

이 지상엔 사람이 없다

하늘엔 해도 없다 달도 없다

모든 신앙도 장난이다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최명란 시인 / 다비, 묵비

 

 

이승의 일

저승 가서도 고자질 마라

당장 잡혀갈 놈 수두룩하다

저승 가면

어떤 일도 말하지 말라고

아무 것도 일러주지 말라고

그들은

솜으로 내 입을 틀어 막고

말 날까 봐 소리 새어 나올까 봐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막았다

나는 죽었다

증거 인멸을 위하여

내 주검 속에 들어 있는

그 많은........

말 못할 사리들

 

(시와정신)

 

 


 

 

최명란 시인 / 초가을

 

 

  지리산 뱀사골 졸참나무 아래

  풍욕하는 한 사내가 태(太)자로 누워 있다

  맨몸을 낙엽 깔린 땅에 바싹 붙이고

  하늘 향해 사지를 척 벌리고 드러누워 있다

  아버지가 임종 전까지 꼭 쥐고 계시던 거

  오줌 호스를 끼우기 위해 간호사가 건드릴 때마다

  어설픈 한손으로 가리기를 먼저 하시던 거

  그 늙은 소년의 수줍음이

  거기 그 졸참나무 아래 솟아 있어

  산다는 건 결국 사타구니에 점 하나 찍는 일

  점이 무너지면 대(大)자로 뻗어버리는 일

  깨벗고 꽈당 드러눕기만 하면 꼿꼿이 일어서는

  풍욕도 도를 넘으면 성욕이 되는 건가

  단단히 점 하나 콕 찍고 누웠다가도

  낙엽 하나 툭 떨어지다 건드리면

  태(太)자는 대(大)자가 되고 마는

 

-중앙일보 2007.07.15 [시가있는아침]-

 

 


 

 

최명란 시인 / 꼬막 캐는 여자의 바다

 

 

겨울이 되면 눈부신 벌교 갯벌에 가보아라

양수가 터진 바다가 갯벌에다 아이를 낳고 아랫배를 드러낸 채 섬기슭으로 달려가 젖을 먹인다

풀어헤친 저고리 틈새로 빠져나오다가 그만 수평선에 걸쳐진 바다의 저 통통한 젖가슴을 빨고 있는 벌교 여자들

새색시 적부터 꼬막밭에 앉아 열심히 바다의 젖을 빠는

자궁에서도 평생 꼬막냄새가 나는 저 벌교의 여자들은

만삭이 된 섬들이 바다에 아이를 낳을 때마다 뻘배를 타고 힘차게 바다로 나아가 꼬막을 캔다

순천만 젖꽃판이 개흙처럼 검어지고 젖꼭지마다 팽팽히 섬을 이룰 때

저마다 꼬막이 되어 갯벌 깊은 바닥에 몸을 숨긴다

행여나 장보고 같은 사내 갯벌 속에 숨어 있을지 몰라 갯벌의 쫄깃쫄깃한 자궁이 되어 숨을 죽인다

때로는 허연 꼬막껍질처럼 길바닥에 버려져

사내들이 짓밟고 지나갈 때마다 서럽게 부서지고 아스러지던 날들

방파제 끝까지 트랙터를 몰고 온 사내들이 소주병을 버리고 모닥불로 타올라도 여자들은 좀처럼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뻘배를 끌고 산고가 채 끝나지 않은 갯벌의 속살을 쓰다듬을 뿐

참꼬막이 가득 담긴 함지박의 웃음이 될 뿐

광활한 치마폭을 펼친 바다는 지금 일몰의 시간

노을 지는 수평선을 목에 감고 뻘밭에 백로는 저 혼자 고독하다

멀리 고깃배 한 척 밀물 때를 기다리며 비스듬히 누워 있다

황금빛 갯벌의 주름진 뱃가죽을 들치며 바다의 젖을 빠는 저 여자들

꼬막 캐는 여자들의 봄이 오는 바다

가끔은 장보고 같은 사내가 찾아와 씨 뿌리는 바다

 

 


 

최명란 시인

1963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세종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200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쓰러지는 법을 배운다』(랜덤하우스. 2008)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