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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향기 시인 / 똥개가 있는 풍경

by 파스칼바이런 2022. 1. 23.

윤향기 시인 / 똥개가 있는 풍경

 

 

 전철이 달린다. 모두가 직렬로 앉아 있다. 끼이익 쿨렁. 잠시 잠들었다 동물들의 포효소리에 눈을 떴다. 어머나! 이 무슨 해괴한 일? 앞좌석 사람들이 동물로 바뀌었다. 몸은 그대로인데 얼굴만 동물이다. 문자전송에 정신없는 토끼, 발칙한 하의실종 생쥐,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돼지, 목을 뒤로 젖히고 입을 벌린 채 코를 고는 닭, 비단으로 온 몸을 감싼 우아한 뱀, 손잡이에 꼬리로 매달린 원숭이, 경로석에는 홀로 굽어 수굿해진 암소, 허리를 받치고 앉은 양 임산부, 안경너머 형형한 눈빛으로 상대의 심연을 꿰뚫어 보는 용, 지팡이를 의지해 서서 휘달리던 광야를 떠올리는 늙은 호랑이, 허겁지겁 신문을 거두어 가는 비루한 말, 발밑을 오가며 존재들의 그림자들을 찾아 내느라 킁킁대는 똥개. 탱화 속 12신에게 절할 때 내 마음의 골짜기에 한 마리 동물만 숨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 마음속 수많은 동물들의 곡비를 듣자 一相이 無相인 우주를 본다.

 

 


 

윤향기 시인 / 객원 편집위원

경기대 대우교수. 1991년『문학예술』등단. 시집『피어라, 플라멘코!』외 5권. 에세이『아모르파티』외 10권. 평론집『나는 타인이다』외 총 2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