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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정희 시인 / 반,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6.

이정희 시인 / 반,반

 

 

하나에서

남남이 되겠다고

기어이 딱 반을 나누어

다른 표정이 되었다

 

웃는 반쪽을 바라보는 반쪽

훔쳐본 누군가의 옆얼굴같이 힐끗

 

내가 나 같지 않을 때

 

흐르는 반쪽의 피가

바깥으로 새어나갔을 뿐이라고

피돌기가 잠시 솟구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이 흘러내려

바닥에 엉겨 붙은 표정이 검붉다

 

오래 굳어 있었던 우리의 반쪽

 

되돌아올까

 

 


 

 

이정희 시인 / 출근을 해고하다

 

 

오랫동안 이어오던 출근을 해고해버렸다

제일 먼저 책상과 의자가 뒷걸음쳐 떠나고

휴대전화 목소리가 떠나고

퇴근시간과 모든 것을 이어주던 골목이 떠나고

공복으로 중얼대던 아침이

까만 양복 넥타이가 떠나고

구두는 뒤축이 꺾였다

 

나를 해고한 순간 회사는 알까

내가 거느리고 있던 수많은 것들을

내가 또 해고해야 된다는 사실을

누구든 한 직장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수많은 골목이 목을 매고

넥타이가 수시로 내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

그런데 회사는 왜 빈자리를 요구할까

 

아침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야말로 악독한 경영주였구나

이제 다시 신입사원을 뽑아야지

혼자 먹는 아침을 채용하고

후줄근한 체육복을 채용하고

쓸쓸한 공원을 배회하는 한나절을 채용하고

뒷산에 나타나는 다람쥐 면접을 보러가고

 

건망증 안경과 게으른 흰머리를

해고하고 채용하고,

과로한 침대가 쓰러지면서 티브이를 걸고 넘어졌다

내가 채용한 것들에게 퇴출당하고

침대모서리에 기대어 잠시 위로 받고 위로 하고

배부른 잔소리와 배고픈 강아지밥그릇만 내 곁을 지켰다

실업도 오래되면 직장이 된다

이정희 시인

 

 


 

경북 고령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20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꽃의 그 다음』이 있음. 제3회 해동공자 최충문학상 시부문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