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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정 시인 / 이발소 그림처럼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6.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조정 시인 / 이발소 그림처럼

 

 

풀은 한 번도 초록빛인 적이 없다

새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해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치자꽃은 한 번도 치자나무에 꽃 핀 적이 없다

뒤통수에 수은이 드문드문 벗겨진

거울을 피해

나무들이 숨을 멈춘 채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친 식탁이 내 늑골 안으로 몸을 구부렸다

밤이 지나가고

문 밖에 아침이 검은 추를 끌며 지나가고

빈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면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본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조정 시인 / 무위사

 

 

절 마당에 발 디딜 데가 안 보여

마애 부처가 돌 속에서 나오다가 멈춘다

 

아이고오 똥도 씨언하게 못 두고 가네

노래하는 새를 찾아 벽화각 돌던 여자가 뛰쳐나가고

죽은 그림에서 산 새를 찾던 여자는 여자대로

동백은 제 꽃을 툭툭 밀어 떨어뜨린다

 

나도 똥, 눌까 말까

사람들이 해우소 문고리를 잡았다 놓았다

많은 괄약근이 한꺼번에 나무관세음하는 초파일

 

 


 

 

조정 시인 / 갈빗집에서 꽃 피는 소리를 듣다

 

 

아뿔싸

여든 여덟 살 잡수신 이로 고기는 쉽게 못 잡수시는 아버님

간 데 없으시다

 

서빙하는 젊은 여자였다

낙과가 태반인 우리 집 감나무 거름으로 쓸 갈비뼈다귀 한 봉다리 가져 와서 아버님 눈에 제 눈을 썩, 맞추는 데

감 열면 저도 주세요오

교태가 자르르르 흘러

맺히지도 않은 올 여름 감꼭지가 모조리 단단해지는데

아찔한 이마를 드니

아버님 간 데 없으시고

관골에 꽃물이든

내 아들

예쁘게 예쁘게 내 앞에 앉아 계셨다

 

냉면 사발을 추켜들고 남은 국물을 마시는

코끝이 싸하다

나는 냉면 국물에 겨자를 너무 많이 푸는 편이다

 

 


 

 

조정 시인 / 붉은 골목

 

 

길을 잘못 들기는 흔한 일이어서

별 수 없이 다음 골목으로 꺾어들어도 길은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골목에서

늙은 개가 내 차의 브레이크를 밟은 건 아니었고

번호 붙은 유리문들이

홍등 아래 딸 하나씩 담고 사열 중이었다

 

나는 남대문 시장 지하에 앉아

아무도 내가 파는 물건을 사가지 않는 헐벗은 밤을 생으로 삼켜 가며

오장육부를 조금씩 헐어 빚을 갚을 때였는데

길을 잘못 드는 사내도 없는 대낮 골목에 차를 세우고

생수 한 병을 사고

편의점 의자에 앉아 버렸다

와이드 판탈롱 밑 이십 센티 통굽 샌들에 저마다 잘못 접어든 길을 끌고

딸들이 흔들흔들 걸어 나와

내 간과 쓸개와 가래가 잡히기 시작한 허파를

뚝뚝 떼어 먹었다

기도한 지 오래 되어 약도 되지 않는 나는 미안할 뿐이었다

 

A-6호 유리를 닦고 난 여자가

A-7호, A-8호 앞으로 물이 흐르는 양동이를 옮겨가는 동안

생수를 마시며

남자 없이 아이를 배고 싶었다

백 명도 더 되는 딸들을 담아갈 내 자궁을 살펴보았다

날마다 골방에 들어가

낳고 낳아야 할 딸들을 담고 나오는 골목이 붉었다.

 

 


 

 

조정 시인 /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

 

 

눈이 수평선을 지우고

바다가마우지 떼를 지우고 온다

소나무 숲을 지나 송림 슈퍼에서 뜨거운 커피를 산다

알루미늄캔 속에 출렁이는 바다

낡은 목도리를 두른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끊어진 길을 위해

낡은 자전거를 불태문다

딛고 올라가기에 인생만큼 부실한 사다리도 없다

많은 침북을 풀어 물위에 내려 놓은 사람들이 바다를 빠져나간다

굳이 떠나야만 했던 길을 되짚어 가는 동안

눈은 한정 없이 쏟아지고

출항을 포기한 집들은 문을 깊게 닫고 잠이 들 것이다

빈 탈의실이 문도 없이 떨고 서 있다

푸른 비치파라솔을 그려 넣은 옆구리에 한 사내가 오줌을 눈다

내가 그만 바다와 저 비굴한 기다림과

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다

빈 캔을 주머니에 넣고

문동화를 벗어 털면

병든 시계바늘이 쏟아진다

엇갈린 바늘처럼 비명을 지르는 시계가 내 발바닥에 고인다

제 때 제 곳으로 가지 못하는 발을 위해 나는 발복을 불태워 버린다

거대한 냉기가 모래를 헤치고 엎드려

손을 내민다

조금 더 내리고 말 눈이 아니다

바다가마우지가 바다를 통째로 삼키고 올라온다

올라오지 않는다

바다가 큰손으로 나를 구겨서 쥔다

 

 


 

 

조정 시인 / 철쭉제

 

 

봄이 천천히

늦게 도착하는 의사처럼 길을 늦추어 오더니

치사량 넘는 꽃을 주사했다

근육질 단단한 능선을 따라

몰아치는

다홍바다陳*

 

끊으며 다그치며

꽃은 꽃에 연하여 끝이 없고

산은 산에 연하여 줄기차다

새들이 깊은 하늘로 거침없이 몸을 던져 닿고 있는

한 소식 받아 칠만 하다.

 

서시 (2006년 봄호)

 

 


 

조정 시인

1956년 전남 영암 출생. 1998년 국민일보 「신앙시 공모」 최우수상. 2000년 ≪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 <이발소 그림처럼> 당선 등단. 서울 서초동 사랑의 교회 신문 「우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