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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기완 시인 / 첫딸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6.

백기완 시인 / 첫딸

 

 

굳이 시큼한 사과만 먹고 싶다는데 어쩌랴

당구장에서 눈깔을 모로 떠 챙긴 버스값으로

사과 한 톨을 사들고

명동에서 원효로4가 수돗물도 없는 땀방울을 달려

그냥 달려

전승보처럼 엥겨주던 아내가 첫딸을 낳았다

 

할아버진 어비

나는 어야라고 어를수록 물쑥물쑥 크던 갸가

국민학교 가던 날, 관학이한테 얻은 시계로

빨간 아래위를 사 입혔더니

분꽃처럼 활짝 벌어지던 우리 첫딸

 

그첫딸의중학진학은내당대최고의학력이라

 

당대 최고의 요리 짜장면을 먹이며

나는 우두커니 눈물나고

신이 난 아내는 월부 피아노를 사주고

그걸 다시 팔아 통일운동에 바치며

피아노가 다 무언가 지금은

잠든 결레의 가슴을 칠 때라고 속으로 울면

뒷길로 고개 숙여 학교 가던 우리 첫딸

 

그 첫딸이 대학선생이 되자 마루가 꺼지게

들썩이던 아내의 깨끼춤도 잠깐

어머니가 바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거라며

노동현장에서

일년에 한두 번 고추장이나 훔쳐가더니

동해바다 외로운 술집 벽보에 갸는 수배자

나는 도망자로 만났을 때

그 명단을 찢어 거센 동해바다에 던지며

아 나는 못난 애비됨을 얼마나 울었던가

 

그 첫딸이 첫딸을 낳았다

이름을 뭐라고 지을 건가

그때마다 장막은 더 내리쳐 저 멀리 산비탈

어야네 불빛은 변덕변덕

한사코 이 밤을 사르고 있는데

갸는 그저 에미 노릇만 할 건가

 

백기완 시집 <아, 나에게도> 푸른숲 1996

 

 


 

 

백기완 시인 / 이 강산 낙화유수

 

 

1952년 겨울 동숭동 미군 부대가 들어선

서울대학 자리엔 웬일로

날마다 철조망을 울부짖는 어린 여학생의 찢긴 자락

너무 처절했다.

은인들에게 정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냐고

 때려도 또 와 울부짖고

미쳤다고 푸닥거릴 해도 또 와

그렇게도 구슬피 몸부림치던 어느 날

그의 검은 머리까지 빡빡 깎이자 동숭동 일대는 숨을 쉬기가 다 스산했건만

눈이 허옇게 내리는 창경궁 빈 터에선

천상 그 주먹이 폭격기 같은 미군 병사와

여드름도 없이 핼쑥한 한국 소년과 격투가 벌어졌다

조국도 얼씬 못하는 그 여학생의 앙갚음을 한다고

그 소년이 먼저 청한 격투였으나

그것은 천상 폭격기와 초가집과의 싸음이라고나 할까

보나마나 죽음으로 끝이 나는가 싶을 무렵

비실비실 일어나더니만

왔다, 날으는 범처럼 우직끈 받고 앙짱 받으니

폭격기인들 소용있으랴

역시 썩은 주먹이란 헷것임을 증명했을 때 미군들이

박치기는 반칙이라고

야구 방망이를 치켜드는 순간, 한국 사람 구경꾼들

이 그제서야 벌떼처럼 빈 깡통을 던지는 아우성에

미군들은 그 쓰러진 폭격기를 떼메고 가고

 

사람들은 묻는 것이었다 여보게 자네가 도대체 누군

가 ? 나요 ?

나즉이 말하는 것이었다. 이 강산 낙화유수요

그럼 자네가 갸의 오빠란 말인가

아니오 이 강산 낙화유수라나깐요 그러면서

어두워가는 눈발 속을 사라지는

그 헬쑥한 소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자위는

따끈한 동태국이라도 한 그릇 먹이고 싶은

그런 겨울이었다

 

 


 

 

백기완 시인 / 그건 영 실패한 건가

-성산포에서

 

 

날마다 새까맣게 새로 태어나고 싶은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살 수 있는 세상은 안 되는 건가

 

있는 대로 털고 그것까지 다 내주고 싶은

그런 사람들끼리 뜨겁게

뜨겁게 부둥켜 살 수 있는 세상은 안 되는 건가

 

속이고 죽이는 것이 장기였던 못된 것들이

떵떵거리던 이상하고 야릇한 세상도 있었드라는

악몽 같은 전설을 찾아나선 사람들이

그 빛나는 눈으로 일구는 세상은 영 안 되는 건가

 

별빛에게 물어본다

힘이 있다고 사람을 짐승처럼 죽이고 찍어누르고

석쇠 위의 고깃덩이처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되는 건가

 

달빛에게 물어본다

돈, 돈의 환상을 마치 과자 따먹기처럼 매달아

사람을 이리저리 아편보다 더 멀쑥하게

복잡한 단세포로 만들어도 되는 건가

 

깨질수록 벗어버리는 몰개(파도)에게 물어본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사람이 주도하는사람의 세상

그건 영 실패한 건가

 

 


 

 

백기완 시인 / 아, 나에게도

 

아, 나에게도

회초리를 들고 네 이놈

종아리를 걷어올리거라 이놈

그러구선 이 절척이는 항로를

살점이 튕기도록 내려칠 그런

어른이 한 분 계셨으면

 

아, 나에게도

갈 데가 없는 나에게도

새해 새 아침만은

쏘주병을 들고 가 큰절 올리면

엄하게 꾸짖는다는 것이

잔을 받거라

그러구선 아무 말이 없으시는

그런 이가 한 분 계셨으면

 

인고의 끝은 안 보이고

죽음의 끝과 끝까지 맞선

외골수의 나에게도 아, 나에게도

속절없이 엎으려러져

목을 놓아 울어도 되고

한사코 소리내어 꺼이꺼이 울어도 될

그런 밤이라도 한 번 있었으면

 

 


 

 

백기완 시인 /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 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 (白基玩) 시인(1932~2021)

1932년 황해도 은률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출생. 황해도 일도초등학교를 졸업. 해방 이후 월남. 백기완은 초등학교 이외의 정규교육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공부. 실향민 출신으로 일찍이 통일문제에 눈을 떠서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백범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고, 이와 함께 민주화 운.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옥고. 저서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백기완의 통일이야기』 등. 1985.~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2021년 2월 15일 (향년 89세)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