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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별 시인 / 사는 게 눈물겹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4. 26.
제목 없음

김별 시인 / 사는 게 눈물겹다

 

 

햇살 눈부신 창가에서도

꽃밭에 앉아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어도

때로 사는 게 눈물겹다

그대가 아니더라도

사랑이 아니더라도

작은 바람 한 점에도 나부끼는 나뭇잎같이

흔들리고 부대끼고 요동치는 우리들

아!

밀고 당기지 않아도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썰물이다가

밀물이다가

슬픔이 아니더라도

미움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진실만으로

상처 나게 아파하지 않아도

비에 젖은 술패랭이 분홍 꽃처럼

때로 사는 게 눈물겹다.

 

 


 

 

김별 시인 / 목련

 

 

내가 앓고 있는 창가에

아주 떠났으리라 믿었던 여인이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눈부시게 창백한 얼굴로 서서

곧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아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 있었더냐고

잘 있었느냐고

목젖을 막아서는 설움이 일어

끝내 한 마디 묻지 못했다

 

속으로 삭이는 한숨에도 꺾일 듯이

작고 나약한 백혈의 몸

영 잊었다

아예 잊었다 했거늘

야속히도 애타게 기다렸던가

 

흔들리는 어깨를 감싸 줄 수 없는

아 이별보다 더 아픈 만남이여

죄인의 해후인가

 

어디에 화려한 꿈을 접고

들끓던 열정도 향기도 없이

마지막 남은 지친

영혼으로 왔는가

 

꽃아

나를 두고

기어이 목이 부러져

만장輓章 깃발 아래

상여 소리 앞세워 떠나는 꽃아

 

 


 

 

김별 시인 / 꽃이 피는 사연

 

 

산에 들에 도시에 피는 꽃은

저마다 무슨 사연으로 피었을까요

내가 평생 낯선 곳을 민들레꽃처럼 떠돌며

살아야 했던 것처럼

저들도 저렇게 피어야 했던

슬프고 아프고 말 못할 사연이 있었겠지요

그렇지만 얼마나 대견한가요, 포기하지 않고

해마다 거르지 않고 꽃을 피운 것이...

아무도 보는 이 없어도

보잘 것 없어 사랑 받지 못해도

자기만의 색깔과 향기를 머금은 모습이

어느 꽃인들 눈물겹지 않겠어요

세상에 무슨 대단한 것을 바라

양귀비꽃처럼 누구를 유혹하고 미치게 할까요

장미꽃처럼 언간생심 누구의 가슴을 탐 할까요

그냥 피는 거지요. 꽃이니까

꽃은 피어야 하니까

그래야 꽃이니까

눈 비 오고 바람 불어도 피는 거지요

멈추지 않고, 속이지 않고, 울지 않고

저기 저 먼 이국에서 온 꽃들조차

고단하고 서럽고 외로워도

있는 그대로 억세게 피는 거지요

 

그래야 꽃이니까

그게 아름다운 거니까

 

 


 

 

김별 시인 / 약수터에서

 

 

몇 며칠 가지 못했던 약수터를

오늘은 망치 들고

못도 몇 개 들고 갔습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시간이 일러 그런지

사람들은 없었지만

풀잎에서 아직 늦잠 자고 있는

새벽이슬도 깨우고

샛별같이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다람쥐와도 인사하고

산속에서 내려오는 맑은 냇물을 따라

새소리에 귀도 씻으며

약수터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발등이 촉촉이 젖었는데

바가지 걸어 놓는 자리에 빠진 못을

준비해 간 망치로 가지런히 박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조롱박을 차례대로 걸어 놓으니

혼자 보아도 예뻤습니다

그리고 물 한 모금을 떠 마시니

오랜 갈증으로 타던 가슴이

뻥 뚫린 듯

말라있던 땅에 물길이라도 생긴 듯

시원했습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지만

 

가지고 온 물통 하나를 가득 채우니

지쳐 있던 몸도 마음도 새처럼 가벼워

오늘도 역시 특별한 것도 없이 밍밍하고

땅콩을 까먹은 뒤끝처럼 껍데기만 수북이 쌓일 일상이겠지만

깨소금같이 고소한 행복을 가려낼 수 있을 것 같아

돌아오는 길은

개망초며 초롱꽃 며느리밥풀까지

오솔길 가득 그윽한 향을 더해 주고

발걸음은 건반 위를 걷는 듯

사분음표 팔분음표

십육분음표가 되기도 했습니다

 

 


 

 

김별 시인 / 강물

 

 

어제와 오늘의 구분이 없는 강물 위에

멈춤과 흐름이 다르지 않는 강물 위에

눈이 내리네

영원과 순간이 아무 의미 없는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이 다 소용없는

그 합류와 소용돌이와 무심함에

펄펄 비 대신 눈이 내리네

강물 위에 내리는 눈은

자유의 몸부림으로도 쌓이지 못하네

뜨거운 입술이 향기로운 얼굴에 떨어지듯이

활활 타오르는 장작개비를 던져도

아주 잠시 반짝였던 은비늘보다 빠르게

흔적 없이 스러지고 마네

들불이 휩쓸고 간 벌판이 막막히 채워지고

그 불길로 타오르다 지쳐버린 산이 가려지고

천지를 기어이 여백으로 다 비워놓아도 강물은

강물을 떠나지 못하는

지친 영혼을 버려두고 여전히 눈을 맞을 뿐

꽃잎처럼 띄워 보낸 사람과

또 다른 생을 기약한 맹세와

밑바닥까지 돌팔매를 맞았던 파문까지 삼키고도

헛기침 한번 없이

강물은

 

굳이 바다를 약속하지 않는

그저 강물일 뿐이네

 

 


 

 

김별 시인 / 유년의 공백

 

 

수학 숙제를 하며 10빼기 7의

나머지를 묻는

아이의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그만 눈앞이 아득해 졌다

 

참나무에서 잡던 사슴벌레와

모래톱에서 잡던 개미귀신과

싸리비로 깨끗이 쓸어놓은 초여름 황토마당에 지던

감꽃과 실에 꿰어 만들던 감꽃목걸이

지상에서 가장 완벽하던 그 고요 평화

그리고 별과 별똥별과

망아지처럼 뛰며 놀던 강변에 별처럼 피어나던 문둥이꽃

 

도산서원에서 청량산 가는 예던길

그 언저리

물총새가 숲풀 속에 집을 짓고

비오리떼 낙하한 벼랑 끝에 혼백처럼 피어나던 진달래꽃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새벽

땅콩 캐는 황소의 쟁깃날을 따르며

훠이...훠이... 쫓던 까마귀떼는 까악 까악...

꿈속인 듯 나를 아직 그곳 고향 산하에

일곱 살 왕자로 남겨 놓았는데

 

숟가락 몇 개와 이불보퉁이를 진 행렬을

피난민처럼 따라나선 또 다른 새벽은 있어

어느 초라하고 낯선 도시의 후미진 그늘 속에

춥고 두렵고 슬픈 모습을 한

앵벌이아이처럼 앉혀 놓았다

 

그 후 청춘과 세월과 세상을 잃고 수십 년...

잠도 깨진 못한 쓰린 속으로

거울 속에 선 지친 반백을 보았다

눈발이 몰려오던 소나무숲과

어둔 새벽잠을 깨우던 뒤울안 갈참나무와

세찬 물길을 뛰어오르던 빛나던 은어떼

모깃불 멍석 마당에 누워 별을 보다 잠이 들면

떨어져 내리던 별똥별과 함께

내 생의 아름다움은 이미 그렇게

무지개보다 빠르게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김별 시인 / 해맞이

 

 

일출을 보리라고

꼭 보리라고

뜬눈으로 새운 밤

캄캄한 어둠을 뚫고

네 발로 기어

일출산에 올랐다가

붉게 물든 서기를 보고

끝내 해를 못 보았네

그래도 검은 하늘을 붉게 물들인

한바탕 열정을 보았으니

내 얼굴도 뜨겁게 물들었으니

절정을 보지 못한 간절함을

그만 삭여야 하지 않겠는가

다음엔 반드시 해를 보리란

무언의 약속을 믿으며

바람 치는 몇 시간을

정상에서 보냈으니

돌탑에 다시 하나의 돌을 얹고

이제 내려가

동해에 바늘 하나를 던져 놓고

바다와 승부를 겨루어 보리라

이길 때까지

꼭 이길 때까지

 


 

김별 시인

1961년 경북 안동 출생. 시집 『꽃밭에 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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