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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태정 시인 / 배추 절이기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4.

김태정 시인 / 배추 절이기

 

 

아침 일찍 다듬고 썰어서

소금을 뿌려놓은 배추가

저녁이 되도록 절여지지 않는다

소금을 덜 뿌렸나

애당초 너무 억센 배추를 골랐나

아니면 저도 무슨 삭이지 못할

시퍼런 상처라도 갖고 있는 걸까

 

점심 먹고 한번

빨래하며 한번

화장실 가며오며 또 한번

골고루 뒤집어도 주고

소금도 가득 뿌려 주었는데

 

한 주먹 왕소금에도

상처는 좀체 절여지지 않아

갈수록 빳빳이 고개 쳐드는 슬픔

꼭 내 상처를 확인하는 것 같아

 

소금 한 주먹 더 뿌릴까 망설이다가

그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제 스스로 제 성깔 잠재울 때 까지

제 스스로 편안해질 때까지

 

상처를 헤집듯

배추를 뒤집으며

나는 그 날것의 자존심을

한입 베물어본다.

 

 


 

 

김태정 시인 / 까치집

 

 

평창동 세검정 지나면

어김없이 나타나던 홍제동 재개발 구역

저 고층 아파트 꼭대기쯤이었을까

발기발기 까뭉개진 산허리에

아스라이 들어서던 까치집 하나

 

야간대학 늦은 강의를 듣고 귀가하던 내가

꾸벅꾸벅 졸다 깨다

버스 차창에 열댓 번쯤 머리를 짓찧다가도

꼭 그쯤에서 잠이 깨 내어다보던

그 비탈 그 창가의 기우뚱한 삼십 촉 불빛

나처럼 늦은 귀가가 또 있어

이토록 꺼지지 않는

 

학비 벌이 부업도 쫑나고

그나마 다니던 공장도 문을 닫아

터덜터덜 발품만 팔던 내가

졸다 깨다 졸다 깨다 다시 줄다

그쯤에서 잠이 깨 내어다보면

 

산그늘 허물어지는 정거장

자욱이 먼지 일며 버스가 서고

어쩌면 발품만 팔던 귀가가 있어

그처럼 막막한 귀가가 또 있어

가풀막진 그림자 허방지방 오르는 밤 기슭

 

어쩌면 학비 벌이보다

늙다리 학생의 아르바이트보다 절박한

새끼들의 허기진 늦저녁을 위해

아직은 철거되지 않은 밤

식구들의 물기 없는 잠자리를 위해

실밥 먼지 뒤집어쓴 봉두난발

비닐봉지 하나 달랑이며 올라가던

 

까치야 까치야 무얼 먹고 사아니?

 

 


 

 

김태정 시인 / 가을 드들강

 

 

울어매 생전의 소원처럼 새가 되었을까

새라도 깨끗한 물가에 사는 물새가

 

물새가 물음을 떨어뜨리며 날아가자

바람 불고 강물이 잔주름 진다

슬픔은 한빛으로 날아오르는 거

그래, 가끔은 강물도 흔들리는 어깨를

보일 때가 있지

오늘 같이 춥고 떨리는 저녁이면

딸꾹질을 하듯 꾹국 슬픔을 씹어 삼키는

울음은 속울음이어여 하지 울어매처럼

저 홀로 듣는 저의 울음소린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만큼 낮고 고독한 거

아니아니 뒤란에서 저 홀로 익어가는

간장맨치로 톱톱하니

은근하니 맛갈스러운 거

 

강건너 들판에서 매포한 연기가 건너온다

이맘때쯤 눈물은

뜨락에 널어놓은 태양초처럼

매움하니 알큰하니 빠알가니

한세상 슬픔의 속내, 도란도란 익어 가는데

강은 얼마나 많은 울음소릴 감추고 있는지

저 춥고 떨리는 물무늬 다 헤아릴 길 없는데

출렁이는 어깨 다독여 주듯

두터워지는 산그늘이나 한 자락

기일게 끌어 당겨 덮어주고는

나도 그만 강 건너 불빛 속으로 돌아가야 할까부다

 

 


 

 

김태정 시인 / 어란, 리미

 

 

그애에게선 늘 비린내가 났다

어란에서 왔다는 배꽃 리에 아름다울 미

그러나 볼을 꽈릿빛으로 물들이며 웃는 모습은

차라리 동백꽃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했다

리미? 니미? 에라 니기미

더러 짓궂은 마을 처사들의 농에도

그저 배꽃처럼 수줍은 이를 감추며 웃던

간질을 앓는다는 그애. 배꽃 필 무렵이면

아프다던 스물아홉 나이가 문득 슬펐다

 

공양간 툇마루에 붙은 그애의 방은

차마 엿들을 수 없는 전설처럼

늘 고적하게도 닫혀 있었지만

 

햇살 다냥한 아침 박새란 놈

심심한 부리로 콕콕 방문을 두드려

살그머니 벌어지는 문지방 너머

파래처럼 젖은 머리카락 냄새

풀물 들어 눅눅한 잿빛 승복 냄새

스물아홉 처녀의 살 비린내가 뜨물처럼 설레어왔고

읽다 만 법화경 어느 구절엔

빛바랜 꽃잎인 듯

눈물자국이 비늘무늬를 새겨넣기도 했던 것이다

 

윤사월 달빛이

툇마루에 비파나무 그림자를 드리울 때

청어알처럼 잠든 방에서 그애

강오름물고기를 꿈꾸었을까

파동치는 꿈결 따라 어란, 그 고단한 푸른 물소리 밀려오면

뱃전에 튀어오르는 물고기떼처럼 그애

팔지느러미를 파닥이며 태앗적 물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는데

상처난 아가미로 비린 거품을

스물아홉 생의 바다를 토해내는 것이었는데,

 

리미는 저 비린내에서 왔을까

바다를 버린 물고기처럼

뭍으로 뭍으로만

 

달빛이 그니러워 그애,

온몸 파닥이며 비늘을 떨구던 밤

어미 몸을 벗어나는 치어 한마리

그 눈부시도록 아픈 난생의 비밀을

나는 그예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김태정 시인 / 슬픈 싼타

 

 

바람 부는 성탄 전야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그림동화 원고를 메운다

삼십여년 전의 아비가 되어

 

옛날 옛적 갓날 갓적 호랑이 담배 먹고 여우가 시집가던 시절에 인당수보다 깊고 보릿고개보다 높고 배 고픔보다 서러운 산골에 참배같이 늡늡하고 댕돌같이 단단하고 비단처럼 마음씨 고운 나무꾼이 살았더란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배고픈 호랑이가 산속에서 어슬렁어슬렁 내려와... 어쩌면 외로워서 동무가 그리워서 혼자 겨울날 것을 생각하니 까마아득해져서 그래서 호랑이는 산골마을로 내려온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파랑 병을 던지니 물바다가 되고 빨강 병을 던지니 불바다가 되고... 그래서 호랑이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을 가고 나무꾼은 참배 같은 댕돌같은 아들딸 낳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았더란다

 

최저 생계비도 되지 못하는 원고지만

그래도 이런 해피엔딩이 있어서 좋다

삼십여년 전 아비도 그랬을까

 

삼십여년 전 아비의 그림동화 속에서

심청이는 심봉사와 해후하고

홍길동은 혁명을 시도하고

춘향이는 사랑을 꽃피우고

아비는 원고지에 무엇을 완성했을까

호랑이처럼 입 벌리고 있는 가난에

희망의 파랑 병 빨강 병을 던져

아비는 무엇을 구했을까

 

시인도 되지 못하고 소설가도 되지 못한 아비

아침이면 식구들의 양식이 되고

아이들의 양말이며 운동화가 될 원고지에

아비는 좌절된 해피엔딩을 꿈꾸었을까

 

어린 남매와 만삭의 아내

그리고 눈 내리는 성탄 전야

사랑도 혁명도 희망도

아비에게는 한끼의 봉지쌀도 되어주지 못하던

1960년대 그 미완의 성탄 전야

 

 


 

김태정(金兌貞) 시인(1963~2011)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남. 1991년 <사상문예운동>에 「우수」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등단 13년 만에 창작과비평사에서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냄. '시만 빼고 다 버렸다'며 전남 해남 근처 미황사라는 절 아래 동네로 내려가 혼자 살다가 2011년 9월 6일 암으로 세상을 떠남 (향년 48세). 그의 영가는 미황사에서 거두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