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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혜선 시인 / 아버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6.

이혜선 시인 / 아버지

 

 

아버지

어젯 밤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 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지게를 많이 져서 구부정한 등을 기울이고

물끄러미, 할 말 있는 듯 없는 듯 제 얼굴을

건너다보는 그 눈길 앞에서 저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옹이 박힌 그 손에 곡괭이를 잡으시고

파고 또 파도 깊이 모를 허방 같은 삶의

밭이랑을 허비시며

우리 오남매 넉넉히 품어 안아 키워 주신 아버지

 

이제 홀로 고향집에 남아서

날개짓 배워 다 날아가 버린 빈 둥지 지키시며

‘그래, 바쁘지?

내 다아 안다.‘

보고 싶어도 안으로만 삼키고 먼산바라기 되시는 당신은

세상살이 상처 입은 마음 기대어 울고 싶은

고향집 울타리

땡볕도 천둥도 막아 주는 마을 앞 둥구나무

 

아버지

이제 저희가 그 둥구나무 될게요

시원한 그늘에 돗자리 펴고 장기 한 판 두시면서

너털웃음 크게 한 번 웃어 보세요

주름살 골골마다 그리움 배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이혜선 시인 / 새소리 택배

 

 

구례 사는 후배가

택배를 보내왔다

 

울안에

앵두 매실

머위대도 따지 못했어요

 

콩은

밭에서 깍지가 터졌고

 

고구마 두 이랑은

살얼음 낀 뒤에야 캐었답니다

 

감 몇 개

그대로 까치밥이 되고

 

밤은 쥐들 먹이가,

 

대추와 산수유는

새들 먹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 집 울안과 남새밭에는

언제나 새들 지저귀는 소리

끊이지 않아요

 

상자를 여니

 

서리 맞은 누런 호박 한 개와

대추가 들어 있었다

 

고구마 여나믄 개와

주황색 감이

 

남새밭과

감나무를 데리고 들어 있었다

 

바삐 통통거리는

그녀 발소리 속에

 

내년 봄에 필

산수유 꽃망울도 질세라

 

연노랑 하늘을

서둘러 열고 있었다

 

빈 상자 속에서

 

또롱또롱 새소리가

 

방울방울 튀어나왔다

 

뒤이어

지리산이

큰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이혜선(李惠仙) 시인

1950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1981년월간 『시문학』 천료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문과, 세종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저서로는 시집으로 『神 한 마리』,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이』, 『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 『새소리 택배』 와 평론집 『문학과 꿈의 변용』, 『이혜선의 명시산책』,.  한국 현대시인상, 동국문학상, 문학비평가협회상(평론부문), 선사문학상, 윤동주문학상,등을 수상하고 동국대 외래 교수, 세종대 강사, 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 등을 역임. 현재 동국문학인회 회장. 한국 문인협회와 국제 펜 한국본부 이사. <세계일보>에 <이혜선의 한 주의 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