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선 시인 / 아버지
아버지 어젯 밤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 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지게를 많이 져서 구부정한 등을 기울이고 물끄러미, 할 말 있는 듯 없는 듯 제 얼굴을 건너다보는 그 눈길 앞에서 저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옹이 박힌 그 손에 곡괭이를 잡으시고 파고 또 파도 깊이 모를 허방 같은 삶의 밭이랑을 허비시며 우리 오남매 넉넉히 품어 안아 키워 주신 아버지
이제 홀로 고향집에 남아서 날개짓 배워 다 날아가 버린 빈 둥지 지키시며 ‘그래, 바쁘지? 내 다아 안다.‘ 보고 싶어도 안으로만 삼키고 먼산바라기 되시는 당신은 세상살이 상처 입은 마음 기대어 울고 싶은 고향집 울타리 땡볕도 천둥도 막아 주는 마을 앞 둥구나무
아버지 이제 저희가 그 둥구나무 될게요 시원한 그늘에 돗자리 펴고 장기 한 판 두시면서 너털웃음 크게 한 번 웃어 보세요 주름살 골골마다 그리움 배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이혜선 시인 / 새소리 택배
구례 사는 후배가 택배를 보내왔다
울안에 앵두 매실 머위대도 따지 못했어요
콩은 밭에서 깍지가 터졌고
고구마 두 이랑은 살얼음 낀 뒤에야 캐었답니다
감 몇 개 그대로 까치밥이 되고
밤은 쥐들 먹이가,
대추와 산수유는 새들 먹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 집 울안과 남새밭에는 언제나 새들 지저귀는 소리 끊이지 않아요
상자를 여니
서리 맞은 누런 호박 한 개와 대추가 들어 있었다
고구마 여나믄 개와 주황색 감이
남새밭과 감나무를 데리고 들어 있었다
바삐 통통거리는 그녀 발소리 속에
내년 봄에 필 산수유 꽃망울도 질세라
연노랑 하늘을 서둘러 열고 있었다
빈 상자 속에서
또롱또롱 새소리가
방울방울 튀어나왔다
뒤이어 지리산이 큰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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