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 시인(무안) / 유목의 피
집을 짓고 논밭을 일구는 일보다 계절따라 떠돌며 들꽃 보는 일이 행복하다 곡식 거두어 창고에 쌓는 일보다 유목을 동경했다 초원에서 비바람 만나도 젖을 것이 없어 편하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 함부로 굴린 몸 부려 놓아도 받아주는 마음이 있다 울타리 치고 경계하는 일이 삶의 전부인 양 몸부림쳤던 기억 그 기억 어루만져 준 것도 초원의 바람이다 삶의 길 잃어도 초원은 기다려준다
김희정 시인(무안) / 엄마생각 1
간과 쓸개를 내주어도 살기 힘든 세상이다 엄마는 뭘 붙들고 살다 간에 검은 꽃 피어난 걸까 사람들은 타협하고 살아도 녹록지 않다는데 세상이 말한 길 따르지 않아 한평생 가난과 동거하며 살았을까 엄마가 밤새 호스피스 병동에 토해 낸 신음 소리 누군가에게 잘못했다고 비는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은 간도 쓸개도 제 역할을 못할 거라 말한다 이제 어떤 장기가 남아 엄마를 지켜줄 수 있을까
김희정 시인(무안) / 남매탑 가는 길
가파른 길을 헤치며 오르는 연인들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남매탑 전설을 아는 걸까 홍조 띤 얼굴에 사랑의 꽃이 만개를 했네 나는 길을 얼마나 올랐을까 숨이 찬다 내 사랑 만나지 못해 거친 숨만 헐떡거리는 걸까 남매탑은 바람을 담고 눈을 담고 비를 담았지만 아직 연정을 채울 수 없어 산마루에 오르지 못하고 중턱을 지키고 있네 연인들은 앞으로 걸어갈 사랑을 다지며 탑돌이 한다 말없이 서 있는 남매탑 하룻밤 인연을 쌓지 못해 수백 년 세월과 맞서고 있다
김희정 시인(무안) / 영정사진1
어머니는 예쁜 사진 한 장 갖고 싶어 했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장롱 깊숙이 묻어 두었던 봄을 닮은 한복을 입으셨네 온몸에 살아온 잔뿌리를 잔뜩 내리셨네
김희정 시인(무안) / 영정사진2
카메라 불빛에 놀라 잠들었던 어머니의 살아 온 길이 깨어난다 지류를 향한 목마름 앞에서 두레박 끈이 짧아 날마다 비릿한 가난을 헹구려 새벽, 동네 우물 찾아 얼마나 발을 동동거렸을까 오늘 곱게 바른 분은 어머니 얼굴에 잔설처럼 내려 앉아 생의 빈 공간을 메우기에 힘겨워 보인다. 끝내 맨 얼굴로 돌아서는 당신 세상 무엇으로 그 독한 여독을 숨길 수 있을까
김희정 시인(무안) / 봄을 올린다
새 세상을 찾아 떠도는 씨눈 부리 유형하듯 바다에 내린다 바다는 꿈틀거린다 모세의 기적은 섬들을 감싸며 방파제를 넘어 믿음으로 부활한다 광야를 건너온 씨앗만이 생명을 만나듯 수정 된 씨앗은 튼튼한 집을 짓는다 태초의 말씀은, 만삭 달처럼 운명을 키운다 폭풍우처럼 산고를 치르는 밤 양수가 터져 아기의 울음처럼 뱃고등은 겨울을 보낸다 고깃배에 걸린 등은 금줄처럼 봄을 예감한다 봄을 거두기 위한 베드로의 손길은 탯줄 잘라 그물을 엮는다 터져버릴 것 같은 그물 사이로 봄 햇살이 뚝뚝 떨어진다.
김희정 시인(무안) / 대흥사 천불상
바람이 속세의 길을 천불상 얼굴에 조각한다 천불상 하나를 닮고 싶어 공중에 매달린 목어처럼 허공에 떠 있는 나는 날마다 흔들리는 복어가 되어 풍경 소리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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