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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해석 시인 / 한밤중에 우는 아기에게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6.

박해석 시인 / 한밤중에 우는 아기에게

 

 

아가야, 그러나 너무 오래 아프게 울지는 말아라

순둥이 소리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앞으로 아무리 놀랄 만한 신세계가 와도

아저씨는 너에게 그런 날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아무래도 기뻐 울 일보다 슬퍼 울 때가 많을 것이므로

그 때마다 울 울음은 남겨두어야 하므로

 

아가야,

내일 다시 한밤중에 이 아저씨와 함께 깨어

힘차게 우는 울음 속에 또 하루를 커갈 아이야

세상 속으로 한 발짝 더 걸어들어갈 아이야

잘 자렴, 예쁜 꿈 꾸고

 

 


 

 

박해석 시인 / 알바생 엄마

 

 

24시간 편의점 알바생 엄마

방 열 시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

한방중에만 일하는 알바생 엄마

 

전철 한 정거장 거리라지만

가파른 언덕길을 걸어 넘어다니는

또순이 알바생 엄마

 

집에 돌아올 땐 비닐봉지 가득

삼각김밥, 샌드위치, 빵, 우유를

담아 오는 알바생 엄마

 

유통 기한에 걸린 것들이니

깨끗하게 처분하라고

주인이 말해 싸들고 온다는

알바생 엄마

 

형과 나는 아침밥 대신

삼각김밥을 먹고 샌드위치를 씹고

바나나우유를 마시는데

 

엄마는 세수도 않고

잠자느라 바쁘고

딱히 할 일 없는 아빠는

우리를 힐끔거리며

맛있냐? 하고 묻는다

 

형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박해석 시인 / 아빠는 시인

 

 

남한산성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

색깔이 다른 세 개의 공으로

저글링 하는 아저씨가

올라온다

오가는 사람들 스쳐가며

실수 한 번 안한다

신기한 듯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한다

"저 사람

지구를 공기놀이하듯

갖고 노네"

 

 


 

 

박해석 시인 / 변사체로 발견되다

 

 

네 옷은 네 마지막 밤을 덮어주지 않았다

구름 속에서 달이 몇 번 가우뚱거리며 네 얼굴을 비추고 지나갔다

고양이가 네 허리를 타고 넘어가다 미끄러지며 낮게 비명을 질렀다

가까운 공중전화 부스에서는 쉬지 않고 뚜뚜뚜 신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새벽 종소리는 날카롭게 반쯤 열린 네 입술 속으로 파고들었다

환경미화원의 긴 빗자루는 웬 마대자루가 이리 딱딱하냐고 툭툭 두들겨대었다

 

동대문야구장 공중전화 부스 옆 쓰레기 더미 속

파리 떼와 쥐들에게 얼굴과 손의 살점 뜯어 먹히며 보름 동안

그는 그들과 함께 살았다 죽었다

 

* 박해석 시인 : 시집 『하늘은 저쪽』中에서, 실천문학, 2005년.

 

 


 

박해석 시인

전주에서 출생. 1995년 《국민일보문학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눈물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견딜 수 없는 날들』, 『하늘은 저쪽』, 『중얼거리는 천사들』 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