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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향 시인 / 목단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7.

이향 시인 / 목단

 

 

소리에 심을 박으라고 선생은 말하지만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그것만

잘 하면 다 된다는데

아득하다

심이란 진흙탕 물을 다 가라앉힌 샘물 같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 만난 팽 나무의 굵은 허리 같기도 한데

목단을 본다

어디까지 내려갔다온 것일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에 찔렸던 것일까

마음에 소리를 심으라는 말이 또 붉어온다

심이란 독약 든 사발 같기도 하고 흰 눈 소복한 은그릇 같기도 한데

목단은 뙤약볕에 한껏 벌어지고 있다.

 

 


 

 

이향 시인 / 구겨진 몸

 

 

불 피우다 보면

구겨진 종이가 더 잘 탄다

주름살 많은 부채 속, 바람 잡혀 있듯

구겨진 몸에는 통로가 있다

밑바닥까지 굴러본 뒤에야 깊어지는 숨처럼

구석에 쿡, 쳐 박혀봐야

뻑뻑한 등도 굽을 수 있지

그래야 바람을 안을 수 있지

반듯한 종이가 모서리 들이미는 사이

한 뭉치 종이가 불을 먼저 안는다

구겨진다는 것은 바짝 다가선다는 것일까

더 망칠 것 없다는 듯

온 몸으로 불길을 연다

 

그 얇은 몸으로 불을 살린다

 

 


 

 

이향 시인 / 밤의 그늘

 

 

나무는 나무에서 걸어나오고

돌은 돌에서 태어난다

 

뱀은 다시 허물을 껴입고

그늘은 그늘로 돌아온다

 

깊고 푸른 심연 속에서

흰 그늘을 뿜어올리는

검은

등불

 

낮에 펼쳐둔 두꺼운 책갈피로 밤이 쌓인다

 

달의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다시 펼쳐지는

밤의

정원에서

 

멀리 걸어나와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저 혼자 앉아 있는

 

 


 

 

이향 시인 / 희다

 

 

어딘가에 닿으려는 간절한 손짓

펄럭이다 돌아오는 사이

이미 내 목덜미를 감고 있다

낙타가 모래바람을 건널 때 순한 눈을 가려줄

속눈썹 같은,

깊은 잠 베개 밑에서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줄

손가락 같은, 그 빛에 싸여

우리는 이미 가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어쩔 수 없이 몸을 놓아야 할 때

가만히 내미는 손

초면 같지 않아 오래 들여다보면

따라가 보고 싶지만

아직은 이 골목 저 골목 당신을 기웃거리는

그 빛,

 

 


 

 

이향 시인 / 유리문 안에서 1

 

 

슬픔이 찾아오지 않은지 오래다

두려움이 커지면 창을 만드네

늦은 밤 가게들의 문 닫는 소리

밤을 뒤지는 눈빛

사라진 골목을 짖어대는 개들

창은 무얼 찾아 돌아다니는 걸까

슬픔이 돌아오지 않은지 오래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창을 만드네

점점 부끄러워지는 용서들

시들어가는 영혼

익숙해져버린 눈동자

창으로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아무리 할퀴어도 자국이 생기지 않는 유리문에

누군가 바짝 붙어

불안에 떨고 있다

 

 


 

 

이향 시인 / 새해

-김보라 작업실 벽에 그려진 푸르고 어린 말에게

 

 

머리에 장난감 같은 플라스틱 뿔이나 하나 달고

나와,

뒷발질이나 하고 있다

짐승의 새끼로 막 태어날 때,

어떤 막에 싸여 맨바닥에 툭, 던져질 때,

덥고 푸른 김이 금방 식어버릴 때,

푸들푸들 한기를 털며 겨우 일어서보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어린 말은

그저 네발로 버티고 있다

 

반쯤은 눈썹에 가려진 눈, 그 눈으로 낯선 그림자가 들어서고,

눈곱이 끼고, 먼지바람이 갈기를 세우겠지

머지않아

흙바닥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을 후회하게 될

푸르고 어린 말은,

 

 


 

 

이향 시인 / 흘러내리고 있다

 

 

 한 번도 감정에 휘말린 적 없는 벽은 평평하고 반듯하다 그 벽에 누군가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낸 뒤로 벽은 더 단단해졌다 앞으로 닥쳐올 어떤 일에 좌절이나 분노가 없을 것 같지만 언젠가 허물어져 내릴 수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더러는 벽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먹질도 해 보지 못 한 채 결국 오줌도 갈기지 않은 채 침만 삼키며 당해 준 적 있다 벽은 한계에 부딪칠 때면 담쟁이를 감아올리거나 구멍을 뚫어 자신을 달래보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모른다 어느 날 말로는 표현 할 수 없는 뒤엉킨 눈빛으로 이제 그만 주저앉으려는 너를 위해, 어떤 순간을 또 다른 순간으로 돌려보내 주고 싶은지 벽은 이미 흘러내리고 있다

 

 


 

 

이향 시인 / 산수유

 

 

황소개구리가 뱀을 삼킨다

눈 껌뻑거릴 때마다 뱀이 조금씩 몸속으로 들어간다

밖에서 틀었던 똬리

안이라고 못 틀겠는가마는,

그 긴 것이 들어갈 때

황소개구리 눈은 더 튀어나온다

 

어쩌다 남의 눈으로 들어간 저 괴상한 울음이

노랗게 터지는 밤이다

 

 


 

 

이향 시인 / 소

 

 

잘 해보겠다고 제 혀로 제 사타구니를

핥을 때도 있다

 

 


 

이향 시인

1964년 경북 감포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2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희다』 『침묵이 침묵에게』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