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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우신 시인 / 한강대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7.

정우신 시인 / 한강대교

 

 

세계는 옷차림만 달라졌을 뿐

 

누가 부르는 걸까

충분하다고

뛰어내리라고 누가 부르는 걸까

 

눈을 감았다

안개처럼 눈을 감고 강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알루미늄을 씹었다 뱉었다

 

어느 무당의 말처럼 물을 멀리했다면

미래는 조금 더 가벼워졌을까

슬픔이 덜했을까

 

손끝으로 어둠을 두드리다 보면

가끔 별똥별이 보이지

당신의 입속에 있는 자두

더욱 빠르게 마르지

 

초점은 지금부터 잠자리의 몫

초록 눈꺼풀에 감겨 보이지 않는 가을의 몫

 

 


 

 

정우신 시인 / 원숭이 연극

 

 

원숭이를 가득 실은 기차가 국경이었던 지역을 넘어가고 있다

 

벽을 두드리며

석탄을 채취하던 원숭이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검은 뼈를 가진 어둠의 정강이에 대하여

 

허공에 붉은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자의 망각에 대하여

 

기차 바퀴에 밟혀

운석이 튀어 오르고

창문으로 유황가스가

새어 들어온다

 

목에 힘을 주고 얼굴을 튕겼다 앉히며 지루한 시간을 보냈지 주름잡는 자들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버렸지 조상들이 쥐고 간 빛을 훔쳐왔지 악의 개념은 없어졌으니까 번식하는 것이 불법이라면 불법 동료? 원자? 사슬? 왜 나는 멸종한 너희를 생각하는가

 

심장은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레일까지

피를 뿜다가

세상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정밀하게 흘려보내고

 

내 핏줄의 모양으로 너희는 가계도를 만들었군 어느 나무로 튀어나가면 될까 곳곳의 나뭇가지마다 코알라 사슴 하마 기린 자라나네 뒤집으면 다시 해저, 세계는 결국 거대 생물체의 내면이군 내가 신경계 역할을 했다니 나의 풍경은 너희가 잠시 머물렀던 낮과 밤

 

굳은 하반신에서 꼬리가 분열한다

 

기분을 건너뛰며

출몰하는 자

사랑의 노래를 불러라

가죽을 바꿔라

온몸을 들이밀고

가볍게 소화되어라

 

꼬리를 숨긴채

뛰어내리려 하는 원숭이를 본다

 

곧 갈아입을 형체에 대하여

 

행성에 띠를 만들며 굵어지는 폭설에 대하여

 

 


 

 

정우신 시인 / 비금속 소년

 

 

여름이 소년의 꿈을 꾸는 중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리곤 했다 우리는 장작을 쌓으며 여름과 함께 증발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화산은 시력을 다한 신의 빈 눈동자 깜박이면 죽은 그림자가 흘러나와 눈먼 동물들의 밤이 되었다 스스로 녹이 된 소년, 꿈이 아니었으면 싶어 흐늘거리는 뼈를 만지며 줄기였으면 싶어 물의 텅 빈 눈을 들여다보았다 멀리,

 

숲이 호수로 걸어가고 있다 버드나무가 물의 눈동자를 찌르고 있다 지워진 얼굴 위로 돋아나는 여름, 신은 태양의 가면을 쓰고 용접을 했다 소년이 나의 꿈속으로 들어와 팔을 휘두르면

 

나는 나무에 가만히 기댄 채 넝쿨과 담장과 벌레를 그렸다 소년은 내가 그린 것에 명암을 넣었다 거대한 어둠이 필요해 우리는 불을 쬐면서 서로의 그림자를 바꿔 입었다 달궈진 돌을 쥐고 순례를 결심하곤 했다

 

소년은 그림자를 돌에 가둬 놓고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나의 무릎에 이어진 소년, 이음새를 교환할 때마다 새 소리를 냈다

 

 


 

 

정우신 시인 / 풀

 

 

움직이는 것은 슬픈가.

차가운 것은 움직이지 않는가.

 

발목은 눈보라와 함께 증발해 버린 청춘, 다리를 절룩이며 파이프를 옮겼다. 눈을 쓸고 뒤를 돌아보면 다시 눈 속에 파묻힌 다리. 자라고 있을까.

 

달팽이가, 어느 날 아침 운동화 앞으로 갑자기 떨어진 달팽이가 레일 위를 기어가고 있다.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을까. 다락방에서 반찬을 몰래 집어먹다 잠든 소년의 꿈속으로. 덧댄 금속이 닳아서 살을 드러내는 현실의 기분으로.

 

월급을 전부 부쳤다. 온종일 걸었다. 산책을 하는 신의 풍경, 움직이는 생물이 없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없다. 공장으로 돌아와 무릎 크기의 눈덩이를 몇 개 만들다가 잠에 든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슬픈가.

가만히 있는 식물은 왜 움직이는가.

 

밤이, 어느 작은 마을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밤이 등 위에 정적을 올려놓고 천천히 기어간다. 플랫폼으로. 플랫폼으로. 나를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창밖으로 내리는 눈발의 패턴이 바뀐다.

 

간혹 달팽이 위로 바퀴가 지나가면 슬프다고 말했다.

 

잠들어 있는 마음이 부풀고 있다.

 

나를 민다.

나를 민다.

 

 


 

정우신 시인

1984년 인천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금속 소년』과 앤솔로지 시집 『도넛 시티』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