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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성호 시인 / 벚꽃 핀 술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8.

함성호 시인 / 벚꽃 핀 술잔

 

 

마셔, 너 같은 년 처음 봐

이년아 치마 좀 내리고, 말끝마다

그렇지 않아요? 라는 말 좀 그만 해

내가 왜 화대 내고 네년 시중을 들어야 하는지

나도 한시름 덜려고 와서는 이게 무슨 봉변이야

미친년

나도 생이 슬퍼서 우는 놈이야

니가 작부ᄂ지 내가 작부ᄂ지

술이나 쳐봐, 아까부터 자꾸 흐드러진 꽃잎만 술잔에 그득해

귀찮아 죽겠어, 입가에 묻은 꽃잎이나 털고 말해

아무 아픔도 없이 우리 그냥 위만 버렸으면

꽃 다 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게

니는 니가 좀 따라 마셔

잔 비면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지 말고

술보다 독한 게 인생이라고?

뽕짝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술이나 쳐

또 봄이잖니

 

시집- 아름다운 병(문학과 지성사)

 

 


 

 

함성호 시인 / 물의 철학자

 

 

떠든 말마다 오류고

설계한 집마다 비가 샌다

 

다 어기고

단 한 말씀을 어기지 않은 죄로

청개구리가 울고

 

비만 오면 내 전화기는 울어댄다

(능소화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로부터)

비가 샌다고

물이 찬다고

 

나는 무엇을 어기지 않은 것일까?

말씀의 하자보수기간이 영원하다면

말씀의 건축은 영원히 보수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물의 욕망을 다 들여다보았다,

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안다,

고 할 수는 없다

 

보는 것과 아는 것 사이에서

나는 당황하고 있을 뿐이다

 

농부는 물의 정치가다

때맞춰 가두고

때맞춰 보낼 줄 안다

 

나는 물의 철학자다

전전긍긍한다

 

(함성호 시집, <타지 않는 혀>, 문학과지성사, 2021)

 

 


 

 

함성호 시인 / 봄내,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바다를 보지 못해 나는 병들었다

 

헛헛한 꽃들이 마른버짐처럼 피어나는 한 철 송화가루 날리는 독백의 산 그림자 속에서 나는 변절의 수상스런 기포를 끊임없이 뿜어올리는 눈먼 쏘가리였다 청춘의 푸른 가시에 상처입은 맨살 위로 축축한 안개에 불을 지르는 자학의 방화범, 얼른 잿더미 위로 화해버리지 못해 안달하곤 하던 번제의 부정한 제물이었다 솔잎혹파리에 침식당한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은·백 ·회색의 나무들을 기르는 긴 강이 비에 젖을 때 내 광활한 불의 나무숲도 그 중심으로 푸르게 젖어갔다―짙푸른 밤의 바다뱀 자리가 눈부신 햇살을 인 자작나무처럼 별들은 사원 목어의 빈 배를 두드리며 죽은 나무숲의 뿌리를 적시고는 곧, 지하의 수맥으로 흘러갔다 봄볕에 투사된 연록색 이파리 위에서 봄볕보다 더 투명해져가던 카멜레온의 진정한 색은 무엇이었을까―무성한 수풀이 가리마처럼 갈라지며 종다리 우짖는 창천의 하늘 아래로 한 마리 정결한 산뱀이 사라져가고 가는 가지에서 막 자라는 순결한 잎은 마지막 내려앉는 불온 삐라처럼 빛났다 엄청난 수압의 폭포를 뚫고 둥지를 키우는 물까마귀의 날개처럼 몰래 키워 온 내 어린 철쭉의 붉은 꽃잎도 폭설에 부러지는 예각의 솔가지로 눈멀어갔다 강의 상류로 흘러가는 일점 바람은 뛰어 오르는 잉어의 아가미를 꿰어내고 봄내,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함성호, 『56억 7천만 년의 고독』, 문학과지성사, 1992년

 

 


 

함성호 시인

1963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강원대 건축과를 졸업했다. 1990년 계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비와 바람 속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시집 <56억 7천만 년의 고독>, <성(聖) 타즈마할>과 산문집 <허무의 기록> 등이 있다. 1991년 건축 전문지 <공간>에 건축 평론이 당선되어 건축 평론가로도 활동하고 있으며, '21세기 전망' 동인이다. 2004년 현재 건축설계사무소 EON을 운영하고 있다. 웹진 PENCIL, 계간 『문학 판』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