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빈 시인 / 꿈의 비단길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겨우 몇 뼘 남지 않은 저물녘에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길은 내 마음을 거쳐가고 있다는 것을 그 길에 피고 지는 것이 장미꽃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적시고 가는 것이 단비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훑고 가는 것이 봄바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섶에 우는 것이 뻐꾸기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 길을 돌고 돌아 다시 원점에 가 닿는다는 것을
일생을 두고 한결같이 그토록 애타게 찾아 헤맸던 꿈의 비단길이 내가 나날이 허둥거리며 허투루 밟고 지나온 그 길임을 땅거미가 내릴 때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나마 어두워지기 전에
홍종빈 시인 / 씨 뿌리는 봄날의 풍경
낙동강 강가에서 마흔을 갓 넘긴 상복의 여인이 유골을 뿌리고 있다. 4월의 햇살에 꽃가루처럼 흩어지는 유골, 수면에 잠시 수피水皮로 떠돌더니 물결 속으로 빨려든다. 가슴에 고여 있던 눈물이 비로소 긴 강물이 되어 흐른다.
낙동강 둔치에서 일흔이 훨씬 넘은 농부가 허리를 굽힌 채 씨앗을 뿌리고 있다. 농부의 굽은 등허리 위로 4월의 햇살이 꽃가루처럼 쏟아지고 있다. 농부의 손에서 뿌려지는 씨앗, 햇살 아래 슬쩍 몸을 뒤척이다가 흙 속으로 묻혀간다. 흙속에 묻혀 비로소 한 생이 길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강물과 둔치의 경계는 허물어져 있다. 물빛과 흙빛의 경계도 어느새 허공처럼 흐려져 있다. 유골을 뿌리는 여인과 농부가 봄날의 햇살 속에서 아른거리더니 기어이 한 무더기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뼛가루가 뿌려져 씨앗이 되고 씨앗이 뿌려져 뼛가루가 되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가루로 뿌려져 하나의 뿌리로 묻히는 것을 먼 풍경으로 바라보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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