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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진 시인 / 들깨 밭 가는 길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6. 10.

김정진 시인 / 들깨 밭 가는 길

 

 

희뿌연 안개가 가득한 이른 새벽

잠깨어

작은 고갯길을 넘어 들깨 밭으로 간다.

견공들은 산보 나가는 줄 알고

마냥 좋아 껑충껑충 뛰어오른다.

비 오는 여름날

척박한 땅의 초목들이 앞 다투어 자라듯

들깨 밭 잡초도 무성하기만 하다.

향기품은 꽃들은 한여름도 해사한데

들깨 밭 잡초들은 이내

농부의 손에 무자비하게 뽑혀 길거리에 던져진다.

고즈넉한 숲속에서 뻐꾸기 소리만 아련하고...

 

 


 

 

김정진 시인 / 내가 그린 기린 그림 네가 그린 구름 그림

 

 

흰 바탕에도 하얀색을 덧칠하는 것이 너의 방식

비어 있는 자음의 자리에 이응을 넣어 읽는 것처럼

여백 같아 보여도 한 번은 손으로 쓰다듬은 흔적

 

슬라이드가 돌아가면 오래 묵은 먼지 속

붓질을 하는 사람의 손

 

나의 손에는 물이 없고 기약이 없고 전말이 없고

그런 이야기

어째서 어렵게 준비한 오늘은 이렇게 쉽게 지나가는지

 

흰 스크린 안의 흰 캔버스 안의 흰

투명한 것은 저항을 갖고 있다 손을 대면

밀어내는 미약한 힘

 

내가 가진 가정假定이 딱 그 정도라고

백지에 쓰여 있다 거기라고 모든 것을 고백하지는 않지만

 

목이 긴 짐승이 갈구하고 있는 범람

말 못해도 굽히지 않은 고개가 향한 곳을 보면 알 수 있는

멀리에

 

화재로부터 빛과 재와 열이 날아온다

보잘 것 없는 투명의 저항

흰색을 덧칠한 곳에 흰 것이 두터워지고

나는 이제 그것을 손에 쥘 수 있다

 

흰 스크린 안에 흰 구름 안에 다시 흰 스크린

위에 자꾸 쌓이고 싶은 희소식

 

우리가 만든 부산물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 나 없는 미래를 알게 될 것이므로

그래 그래

어쩌면 우리가 모두 사라진 뒤에도

 

흘러넘치겠지 자연이 될 수 있겠지

연구를 하겠지 쥔 것을 놓지 않고 있는 손

 

노래의 구조를 배우고 나면

이제 전과 같이 노래 들을 수 없다

 

-2021년 미네르바 봄호 수록시

 

 


 

 

제9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

김정진 시인 / 항(상)성

 

 

여기서 잠시 불을 붙였다 갑시다

 

여름을 빨리 불러오고 싶었어요 하지(夏至)의 높은 태양을

만원버스 안에서 같은 리듬으로 동시에

흔들리면서 서로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손이 녹을 수 있도록

몸이 따뜻해지도록

태울 것들을 좀 찾아봅시다

 

종점은 처음인가 봐요 당신에게서 반환점의 냄새가 나는데

한번 뒤돌아서 봐요 저 사람이 말하길

당신이 어제 앞에 앉았던 사람과 닮았다는데

 

잘 타는 것들 연기가

적게 나고 불빛이 멀리까지 가는 것들

내 전임자는 이런 여유를 허락한 적이 없었죠 원심력처럼 창밖을 보세요 동지(冬至)의 가까운 저녁을

저기 물미역처럼 하늘거리는 플라타너스들

 

전에는 이렇게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는 잘 지냅니다 덕분에

 

잘 지내지 못해요

 

모닥불은 처음인가 봐요 어두웠다 밝아지는 건

주변의 습도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가스가 많으면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다시 점점 멀어진다면

기념품 가게에서 그냥 나오는 사람처럼

여러 번 집었다 놓은 믿음은 어디쯤일까요

 

영생하는 사람은 늙지 않을까요 언제부터

소년이나 노인의 모습으로

망원경을 들어 기점을 찾아보세요

 

점차로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보일 겁니다

 

 


 

 

김정진 시인 / 계절감

 

 

 바닷물의 수온이 높아지고 남쪽부터 평균 기온이 올라 본래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과일을 우리나라에서도 재배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상 기후와 온난화가 앞으로 어떻게 더 영향을 끼치게 될지 아직은 명확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단지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모호해지는 계절들이 떠오릅니다. 섞이고 혼재되고 덩어리가 되는 여름과 가을이, 겨울이 지나고 사라진 봄을 건너 돌아오는 여름이 그려집니다. 계절들이 변하면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기억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

 

 


 

김정진 시인

1993년 전남 광양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2016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시산맥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