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진 시인 / 들깨 밭 가는 길
희뿌연 안개가 가득한 이른 새벽 잠깨어 작은 고갯길을 넘어 들깨 밭으로 간다. 견공들은 산보 나가는 줄 알고 마냥 좋아 껑충껑충 뛰어오른다. 비 오는 여름날 척박한 땅의 초목들이 앞 다투어 자라듯 들깨 밭 잡초도 무성하기만 하다. 향기품은 꽃들은 한여름도 해사한데 들깨 밭 잡초들은 이내 농부의 손에 무자비하게 뽑혀 길거리에 던져진다. 고즈넉한 숲속에서 뻐꾸기 소리만 아련하고...
김정진 시인 / 내가 그린 기린 그림 네가 그린 구름 그림
흰 바탕에도 하얀색을 덧칠하는 것이 너의 방식 비어 있는 자음의 자리에 이응을 넣어 읽는 것처럼 여백 같아 보여도 한 번은 손으로 쓰다듬은 흔적
슬라이드가 돌아가면 오래 묵은 먼지 속 붓질을 하는 사람의 손
나의 손에는 물이 없고 기약이 없고 전말이 없고 그런 이야기 어째서 어렵게 준비한 오늘은 이렇게 쉽게 지나가는지
흰 스크린 안의 흰 캔버스 안의 흰 투명한 것은 저항을 갖고 있다 손을 대면 밀어내는 미약한 힘
내가 가진 가정假定이 딱 그 정도라고 백지에 쓰여 있다 거기라고 모든 것을 고백하지는 않지만
목이 긴 짐승이 갈구하고 있는 범람 말 못해도 굽히지 않은 고개가 향한 곳을 보면 알 수 있는 멀리에
화재로부터 빛과 재와 열이 날아온다 보잘 것 없는 투명의 저항 흰색을 덧칠한 곳에 흰 것이 두터워지고 나는 이제 그것을 손에 쥘 수 있다
흰 스크린 안에 흰 구름 안에 다시 흰 스크린 위에 자꾸 쌓이고 싶은 희소식
우리가 만든 부산물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 나 없는 미래를 알게 될 것이므로 그래 그래 어쩌면 우리가 모두 사라진 뒤에도
흘러넘치겠지 자연이 될 수 있겠지 연구를 하겠지 쥔 것을 놓지 않고 있는 손
노래의 구조를 배우고 나면 이제 전과 같이 노래 들을 수 없다
-2021년 미네르바 봄호 수록시
제9회 시산맥 작품상 수상작 김정진 시인 / 항(상)성
여기서 잠시 불을 붙였다 갑시다
여름을 빨리 불러오고 싶었어요 하지(夏至)의 높은 태양을 만원버스 안에서 같은 리듬으로 동시에 흔들리면서 서로를 기대하고
기다리면서
손이 녹을 수 있도록 몸이 따뜻해지도록 태울 것들을 좀 찾아봅시다
종점은 처음인가 봐요 당신에게서 반환점의 냄새가 나는데 한번 뒤돌아서 봐요 저 사람이 말하길 당신이 어제 앞에 앉았던 사람과 닮았다는데
잘 타는 것들 연기가 적게 나고 불빛이 멀리까지 가는 것들 내 전임자는 이런 여유를 허락한 적이 없었죠 원심력처럼 창밖을 보세요 동지(冬至)의 가까운 저녁을 저기 물미역처럼 하늘거리는 플라타너스들
전에는 이렇게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습니다 나는 잘 지냅니다 덕분에
잘 지내지 못해요
모닥불은 처음인가 봐요 어두웠다 밝아지는 건 주변의 습도가 높아서 그렇습니다 가스가 많으면 반짝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다시 점점 멀어진다면 기념품 가게에서 그냥 나오는 사람처럼 여러 번 집었다 놓은 믿음은 어디쯤일까요
영생하는 사람은 늙지 않을까요 언제부터 소년이나 노인의 모습으로 망원경을 들어 기점을 찾아보세요
점차로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게 보일 겁니다
김정진 시인 / 계절감
바닷물의 수온이 높아지고 남쪽부터 평균 기온이 올라 본래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과일을 우리나라에서도 재배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이상 기후와 온난화가 앞으로 어떻게 더 영향을 끼치게 될지 아직은 명확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단지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모호해지는 계절들이 떠오릅니다. 섞이고 혼재되고 덩어리가 되는 여름과 가을이, 겨울이 지나고 사라진 봄을 건너 돌아오는 여름이 그려집니다. 계절들이 변하면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기억들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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