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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서연 시인 / 벌레집에 세 들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2.

강서연 시인 / 벌레집에 세 들다

 

 

백아산 골짜기 송이버섯 같은 집 한 채

갓 지붕 너머 낮달에서는 짙은 놋그릇 냄새

녹음이 벽지를 겹쳐 바른 이곳이 애초 벌레들의 집이었다니

그들은 날개가 있고 나는 없으니

그들에게 있는 것이 내게는 없었으니

무엇을 담보로 한 계절 묵어갈까 궁리하고 있는데

도랑물 수시로 쌀 씻어 안치는 소리에 문득

내가 당신을 이토록 사랑했었다니,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파온다

 

초저녁 비는 자귀꽃잎 사이사이를 적시고

벌레 먹은 배춧잎에 쌀밥 얹고 된장 한 숟갈 얹으면

그러니까 내가 사랑했던 당신을 데리고

붉은 지네 한 마리 기어 나온다

누가 이 늦은 밤에 싸릿대 질끈 묶어 마당을 쓰는가

잊어야산다 잊어야산다 뻐꾸기도 잠든 밤

 

주민세와 인터넷 사용료는 내가 낼 테니

전기세는 반딧불이와 정산하시게나

흙 속 어디에 길이 있어 마당을 저리 촘촘 가로지르는지

재산세는 망초바랭이명아주쇠뜨기괴싱아 푸른 잎으로 받으시고

그도 저도 난감하면 이장님 같은 산 그림자에 물리시게

소득세니 물세는 저 들이 알아서 내지 않겠는가

주세도 내가 낼 테니 이리 와서 술이나 한 잔 받으시게

밤마다 날은 새고, 청개구리들 빈 신발 떠메고 어디까지 가려는지

 

우리 수일 밤을 그리 동침했으니

도란도란 슬어놓은 알들이 깨어 날 찾거든

칠월 한낮 우주의 가마솥이 펄펄 끓어 넘쳐서

이번 생은 그냥 지나가는 길이니

애써 설명할 필요 없을 것이네

 

 


 

 

강서연 시인 / 소매물도 분교

 

 

종일 파도소리만 들리는 분교는 오래전에 수업이 끝났다

 

동박새 한 마리 오래 앉아있다 날아간 텅 빈 운동장

녹슨 시소 혼자 바람결에 기울어져 있다

마른풀들은 말라서 서로 서걱거리고

동백나무 가지마다 꽃은 피어 시들고 있다

붉은 눈발 날린다.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가는 등대섬

길게 뒷짐 지고 내려와

교감 선생님처럼 운동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간다

어느새 동백 꽃잎, 내 몸에 귀 대고 육지를 엿듣는다

수평선 한 자락 끌어당겨 내 가슴 양지에 꽂으면

떠나간 아이들 소식 들을 수 있을까

 

국어책 속에서 고삐가 풀렸는지

염소 세 마리 마을로 내려가고 있다

 

파도소리에 모서리가 닳은 운동장

섬 귀퉁이에서 쓸쓸한 화음을 내는 소매물도 분교

 

 


 

 

강서연 시인 / 산국 여인숙

 

 

남자와 두 번째 만나 산국을 따러 갔다

37번 국도변 가파른 산비탈

남자는 왜 하필 경사진 꽃방을 얻었을까

준비도 없이 와락, 꽃향기가 스며든다

발목을 핥는 풀잎들은 내가 지나온 길을 서둘러 지우고

바람은 기울어진 쪽으로 더욱 기울어져 갔다

방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벌들의 신음

꽃술 벌어질 때마다 좋아? 좋아! 좋아,

열쇠를 잃어버린 우리들의 방

벌들은 점점 뜨겁게 끓어오르고

저들끼리 헤픈 산국

립스틱 묻은 노란 휴지를 뽑아 던지고 있다

열쇠 구멍에 산국을 꽂아 넣자 자르르 문이 열린다

우리는 서로 어색했지만 모르는척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영영 잊어버리고 싶었다

 

‘중고차 굴러만 가도 삽니다’

플래카드가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베란다

따뜻한 물 위에 띄워놓은 산국 여인숙

찻잔 그림자 길게 몸을 늘여 기웃거리는 해 질 녘

꽃향기에 데인 상처마다 산국이 활짝 피어있다

 

 


 

 

강서연 시인 / 수수가 망을 썼다

 

 

저것은 가을을 부르는 그림엽서

바람의 초대장이다

허공을 젓는 저 필기체의 날갯짓

필시 가장무도회의 필사본이다

수수의 콧노래에 발뒤꿈치가 들린 들녘

우표 속으로 새를 불러 모은다

 

입 안 가득 구름을 몰고 온 한 무리의 새 떼

안부를 묻는 수숫대의 몸짓이 공손하다

새의 부리는 자루처럼 열려있고

내 망막이 발효되는 시간은 온통 가을이다

 

노을 번지는 서쪽 하늘

빈 쭉정이만 남은 수수 모가지 위로

배부른 새 떼 날아오른다.

풍경의 표지는 신간이다

 

 


 

 

강서연 시인 / 개복숭아

 

 

가당치도 않다. 내 몸에 근두암종병*이라니

 

느슨하던 길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자를 대고 쭉 그어놓은 듯한 영산강 기슭

내 비록 귀한 몸은 아니었으나

풀숲에서 홀로 태어나 흙의 젖을 물고 자란 개복숭아

어디 함부로 혹을 매달아 나를 성가시게 하는가

 

나를 유년의 강가로 데려가 다오

나이테의 둥근 문을 열고 들어가면

끝없이 피어오르던 물안개

뱀이 지나가고 풀꽃이 수시로 몸을 뒤집던 그곳

봄마다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도 옷고름 풀어주던 푸른 강둑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벌레 한 마리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열매

누가 내 몸을 낱낱이 훔쳐 가다오

매단 것 없이 홀로 있게 해다오

저 묵은 강줄기를 끌어다가 내 가슴 도려낸 상처에 접붙여다오

내년 이맘때쯤 새살 돋듯 은빛 잉어 몰려와

강물도 몸서리치며 꼬리 흔들며 굽어 흐르게 해다오

 

*근두암종병: 나무의 근두와 뿌리에 혹이 생겨서 말라죽게 하는 병

 

 


 

강서연 시인

전북 김제 출생. 201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가로수 마네킹」으로 등단. 시집으로 『가로수 마네킹』(지혜, 2017)이 있음. 2017년 대전문화재단 창작기금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