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혜 시인 / 검은 옷을 찾으며
아버지 장례식에 가려고 검은 옷을 찾는다.
어렸을 적부터 언니와 내게 손수 옷을 사 입히셨던 아버지.
나, 열 몇 살 땐가. 어금니 아프다고 울면서 아버지 일하던 세탁소로 전화하자 딜리버리 도중 핫 핑크 미니스커트 사 오셔서 이젠 안 아프지 하시던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그 핑크 미니를 입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장례식엔 꼭 가야 하나 장례를 치르지 않으면 아버지가 끝까지 살아 계실 것 같아.
어제 관 속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 꼭 주무시는 것 같았어.
고통 여기저기 퍼지던 암 덩어리만 죽고 아버지만 다시 사시면 안 될까.
절대 만지지 말라는 장의사 몰래 아버지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차 얼음보다도 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기적을 부르짖으려다 그냥 아빠...... 아빠만 부르다가 왔지.
무엇을 입나 차라리 엄마 돌아가셨을 때처럼 소복을 입고 곡이나 실컷 해봤으면
검은 옷은 왠지 슬픔을 억눌러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아.
아버지 장례식에 무엇을 입나 나 망설이며, 옷장 속에서 멍하니 서 있다.
고현혜 시인 / 아직도 그대 안에 있는 전쟁
오늘 밤 내 혀가 은하수를 자른다 검은 뼈 발사되고 울부짖는 첼로 표류된다
내 입 열면 천 개 해골 침묵하는 망망한 암흑 살아 올 수 없는 타클라마칸 사막 묘지로 보내진다
전쟁을 말 한 적이 없는 눈의 불꽃 모든 비밀은 그곳에서 다 타버린다 내 침묵은 너의 입 해골 가득한 기억의 집 내 턱 어둠의 경첩 별빛 더러운 흙 캡슐의 황폐화
백인 남자가 말을 한다
아무도 너의 소리를 듣지 못해 아무도 널 찾을 수가 없어 입을 열어
내가 말한다
내 혀 자르고 불을 질러봐 이 비밀 태울 수 있는지 내겐 다른 혀가 있어 내 눈에 내 뼈에 담은 이전쟁의 모든것을 말할거야
ㅡ『한국동서문학』(2019,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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