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연 시인(여) / 날개
몰락한 가문의 딸 같은 여왕개미를 잡아 유리병 속에 넣고 난 거대한 왕조를 꿈꿨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똑, 똑, 비가 떨어지고 때론 밥솥도 의자도 나가떨어지는 가문 피리로 얻어맞은 허벅지가 부풀어 오른다. 오, 개미굴 같아라, 길을 내다오, 방을 내다오. 날개를 떼어내고 평생 알을 낳는 개미 날개옷을 잃은 선녀는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다. 우악스럽게 아이들을 다그치는 엄마들에게도 날개가 있었을까. 빗방울에 패인 흙이 유리병에 튄다. 무엇을 먹이로 줘야 할지 몰라 흙만 퍼 담고 숨겨놓은 개미 오늘 밤 꿈엔 낯선 남자를 끌어안는 대신 똑, 똑, 날개를 끊어내는 대신 네게 먹을 것을 줄 거야. 그러나 꿈은 토막 난 생선 같아서 곡 중간에 절단이 난다. (머리와 꼬리가 사라지고 배만 남거나) (배가 사라진 머리에 곧장 꼬리가 붙거나) (내 배를 먹으렴, 머리와 꼬리는 어때?)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끅끅, 목이 멘다. 다리가 오그라들어 짜부라져 죽은 날개 달린 그 개미
- <상상인> 2021년 7월
박희연 시인(여) / 물고기
한겨울 아스팔트에 말라붙은 물고기를 보았다. 삭풍을 견디는 힘은 가시에서 비롯하는 듯 물고기는 스스로 살을 발라버리고 가시를 점점 더 가늘게 벼리고 있었다.
바람은 종종 눈물을 부른다. 울음은 뼈를 드러내는 일 골수까지 얼어붙는 바람이 불어야 더 열심히 울 수 있다고 더 열심히 울어야 악착같이 끌어안을 수 있다고 악착같이 끌어안아야 두 번 다시 너를 보내지 않을 수 있다고 물고기는 마지막 비늘까지 떼어내며 아스팔트 위에 굴신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목이 조여 오는 세상 스스로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는 제 몸을 불사르고 청계천을 달린 아들의 엄마 진도 바다에 영문도 모르고 수장된 아이의 엄마 아직 엄마 젖 주무르기를 좋아하던 어린 날 전쟁터에 끌려가 갈기갈기 찢긴 이제는 늙어버린 여자 아이 광대뼈가 불거지고 손마디가 굵어지고 거죽 위로 두두룩 뼈마디가 솟아오른 더러는 흙이 된 여자들
한겨울 아스팔트 위에 화석처럼 굳어버린 여자들을 보았다. 그 벼려진 가시 위에 골수처럼 비가 내렸다.
- 2017년 <마로니에 전국여성 백일장> 시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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