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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태맹 시인 / 자귀나무 붉은 꽃 어머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7. 3.

노태맹 시인 / 자귀나무 붉은 꽃 어머니

- 바람의 레퀴엠 4

 

 

저 바람 속에 누군가 있어요, 어머니

자귀나무 꽃잎 끝 붉은빛들로 불려 나와

아직은 불균형의 날개로 회오리치며 날고 있는

어머니, 저 바람 속에 누군가가 있어요.

이제 그리로 가세요

너무 오래 흙이었고

너무 오래 물이었던 당신의 노래도 이제

붉은 꽃으로 피어오르고

무념의 뭉게구름으로 솟아올라서

그리하여 저 바람과 함께 되어

그 어떤 이름으로도 불려지지 마세요.

 

모든 기억의 꽃과 이파리의 끝에서 날아올라

나에게도 모두에게도 잊혀지세요.

투명하게 주름져 접힌 시간들을 두려워 마시고

날아오르고 회오리치는 저 바람의 날개만이

어머니, 당신의 거처일 거예요.

 

저 바람 속에 더 누군가 있어요, 어머니

이제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눈도 지우고

내 정념의 귀도 들리지 않게 하여

자귀나무 붉은 꽃잎 끝으로 불려 나와

흰 나비처럼 바람 속을 두리번거리는 어머니, 어머니

당신들의 순결한 완성을

햇빛 반짝이는 푸른 이파리의 바람결로 느껴요.

 

당신 곁에 누운 다른 모든 육신들도 깨워 어머니

물이 되고, 흙이 되고, 나무가 되어

붉은 꽃들이 손깍지 끼고 날아오르듯

그렇게 함께 날아오르세요.

그리하여 모든 바람의 바람이 된 후

비가 되고 먼지가 되어

저 붉고 푸른 자귀나무 아래

아무도 모르는 환한 뿌리로 다시 잠드소서.

 

나의 기억, 나의 어머니

자귀나무 꽃 붉은 분홍의 어머니, 어머니

바람이 되어 잊혀지세요.

바람이 되어 잊혀지세요.

셀라,

다시 돌아오는 어머니, 나의 어머니시여!

 

 


 

 

노태맹 시인 / 죽음을 마주 보는 두려움

 

 

모래 늪에 갇힌 것처럼

그 노인은 조금씩 꺼져가고 있다.

안간힘으로 부풀어 올리던 생명의 입김도

그의 양 볼처럼 오목하게 꺼져가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숨이 멈추었다.

 

번개의 빛으로도 열린 동공은 닫히지 않고,

천둥의 힘으로도 이제 그의 닫힌 귀를 열게 할 수는 없다.

심전도 기계의 화면에서

날카롭게  뛰어다니던 심장의 발짓도

이내 오래된산처럼 둥글어지다가,

작은 젖꼭지처럼 힘을 잃는다.

 

나는 생의 모든 신호가 멈추기를 기다리며

그 노인의 곁에 서있다.

죽은 이을 내려다보고 있는 내가

꽃도, 잎도 없는 겨울 배롱나무 같다고 잠시 생각한다.

가쁜 숨을 내쉬며

살려 달라고 내 손을 잡던

그 폐암 환자는

내 손을 잡은지 두 시간 후에

그렇게 죽음 저편으로 갔다.

아마 이 세상을 떠난 약 850억번째 호모사피엔스일 것이다.

 

 


 

노태맹 시인

1962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철학과 수료. 1990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유리에 가면〉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유리에 가서 불탄다』 (세계사, 1990) 와 『푸른 염소를 부르다』(만인사, 2008), 『벽암록을 불태우다』가 있음. '오늘의 詩' 동인. 성주 노인요양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