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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상호 시인 / 이별연습 2.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8.

손상호 시인 / 이별연습 2.

 

 

 내 배꼽에는 열쇠가게 스티커가 겹겹이 붙어 있고 배꼽아래에는 사우나탕 스티커가 더덕더덕 붙어 있지요 몸이 무거워진 나는 신호등이 짧은 축협 네거리를 건너가지 못합니다 힘들면 서울로 오라시는 김형, 5월인데도 동강(江)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에 갔다가 욕본 여자는 오늘도 소주를 병 채로 마십니다. 여자의 등 뒤에서 붉은 해가 솟았지만 여자는 여전히 안개를 껴안고 놔주지 않습니다 시든 물매화처럼 물때 짙은 강을 목 놓아 부르다가도 금세 안개를 쫒아 다닙니다 이렇게 풍요로운 날, 마른 강에 빠진 여자를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물비린내가 싫어 허리에 차고 있던 강을 내다버렸겠지요 서울행 비둘기호를 타고 붉은 나무들의 숲으로 떠났겠지요.

 

 


 

 

손상호 시인 / 매일 흔들리는 부호, ?

 

 

 언제부턴가 대덕산을 앞산이라 불러 앞산에는 절이 세 개 있고 여름 햇살 아래 무성하던 갈참나무, 밤들면 어둔 산이 되어 온데간데 없다. 어둠 속에서 이름을 갖는 게 몇이나 될까 가지 사이로 보이던 도시의 불빛, 절마당의 죽은 때죽나무 이파리로 몰려든다 불빛 코앞에서 마을을 모르던 앞산, 혼날까 깜빡 잊은 시늉만 늘 해도 해 뜨면 또 무슨 사나운 꼴 보여야 하나 고민만 하다 밤을 새운 강, 하루하루 입이 더 마른다 마을을 안아주지 못하는 강이 저토록 부끄러워한 적은 없었다. 불안해 손에 쥐고 잠들던 강, 바닥까지 말라버린 오늘, 슬프지만 내일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말라버린 강을 멀리 내다 버리는 당신을 누가 뭐라 할까 도시는 불빛을 앞세워 저의 길을 갈 것이다. 불빛에 가려 절이 있는 산의 갈참나무 숲까지는 멀다 그렇게도 달아나고픈 곳에 서 있는 나에 대한 의문. 매일 흔들리는 부호, ?

K씨, 달리 살아 갈 도리가 없으니까 희망을 품는 거예요.

 

"카프카의 소설 '성'의 한 구절

 

 


 

손상호 시인

1957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1993년 오사카 대학 대학원 졸업(반도체물리학 박사). 2011년 대구문학(대구문협) 시부문 신인상. 2012년 《아시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2014년 이해조문학상 수상.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물리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