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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유니 시인 / 커플T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2.

<시와표현 2019년 신인상>

장유니 시인 / 커플T

 

 

하는 일 없이 가끔 생일이 지워져 없어지는

여자와

별 볼일 없는 생일이 너무 자주 도래하는

남자

 

그들은

같은 달력을 같은 날 침 발라넘기며

 

불면(不眠)의 밤

불멸(不滅)의 자세로 다리가 나란히 꼬인 채

 

확실하게 뒤섞여 살았다

 

 


 

 

장유니 시인 / 이렇게 심심한 것들에 익숙해지면

 

 

낙타는 어쨌든 속눈썹 치켜세우고 발부터 떼야 한다는 걸 알게 되겠지 모래바람에 삼켜지지 않으려면 그래야지 태양에 달궈진 모래는 금방이라도 낙타를 삼킬 수 있거든!

 

어느 여름날 빗방울 몇 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까칠한 입술에 와 머뭇거렸지 비린내가 확 풍겼어 낙타눈썹에 매달린 코끼리들 때문일 거야 그 바람에 낙타의 혹을 끌어안고 잠들었던 별들이 단잠을 깼어

 

낙타는 생짜배기 별들을 한 움큼씩 뱉어냈지 한밤중 서늘한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별의 씨앗들은 은모래의 생살을 비집고 파 들어갔지 까다로운 낙타 발자국들 발자국마다 방 한 칸씩 집이 생겼지 조개껍질 속으로 흘러들어간 별들은 그렇게

 

정착촌을 이루고

 

여름이 만져지면 별이 되고 꽃이 되는 거였다

 

낙타는 말이야 그제서야 잇몸 드러내고 헤죽헤죽 웃을 수 있었지 모래를 뒤집어쓴 태양, 태양을 삼켰다가 항문으로 뱉어냈어 이렇게 심심한 것들에 익숙해지면 사막이 돼버리는 거거든!

 

 


 

 

장유니 시인 / 펫로스pet loss 증후군

 

 

패츌리patchouli 꽃 속으로 들어간 여자

 

저녁을 한 트럭 품고 들어가 도무지

빠져나올 생각이 없다

 

푸른 밤의 박쥐와

상냥한 고양이와

무거운 서재

를 결혼시키면 몇 개의 밤이 태어날까

화요일에 보랏빛 브래지어를 벗으면 보랏빛 연휴가 연달아

생겨난다

 

철없는 애인과 재즈 바에서 태풍 일이키는 일

생각만 해도 신바람 날 게 뻔해!

 

쓸데없이 쓸모없는 모험은

트러블trouble

트러플 머쉬룸truffle mushroom, 송로버섯을 키우지

 

꼬리 감추는 고양이와

고장 난 시계탑

그리고

물 없는 수중공원을 뜻밖의 유산으로

상속 받아

서재를 꾸민다

 

책갈피에 한 여자가 호로록 흩어져 웃고 있다

 

 


 

 

장유니 시인 / 구두여 말발굽 소리를 내다오

 

 

아비시니아 고원을 무작정 달린다 질주한다 물 없는 수족관 속의 열대어가 헤엄치다 멈추고

 

갑자기 모래알 쪼개지는 대낮, 한낮에도 펄럭이는 꿈 조각들 움푹 패인 쇄골에 단비 같은

 

휘청거리는 방어막 무너져 욱신거리는 엉덩이 야만적인 하품만이 제국주의자의 콧대처럼 잠에 쏠리는

 

마부는 보이지도 않는데 때 아닌 말발굽 소리가

마차를 끌고 오고

불려온 그림자들이 밤의 야적장에

수북이 쌓인다

 

열대화 속에 피는 밤공기, 밤공기가 발코니 화분을 먹어치운다 신경 날카로운 꽃냄새가 원색적인 밤을 갈라 놓는다 그렇거나말거나 침묵에 붙들리지 않기, 침묵에 돌을 던지거나 난삽한 질문 때문에 밤을 조각내지 않기

 

밤이 깨진다

 

물을 가둔 수중보가 터지는 소리 흰개미 집단이 거대한 건축물을 허무는 소리 허다하게 파먹은 간과 쓸개를 독수리가 몸 밖으로 내놓을 지경 서늘한 습작시를 불면에 끄적거린다 심야에 범람하는 시심 사막의 구릉 위에 메마른 밤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빈손이 깨어나 어둠을 만진다

 

하지만 구두여 뒷굽 닳아 밑창 나간 구두여, 난제를 덜어내고 새벽은 언제쯤 말발굽 소릴 끌고 올 것인가 발자국소리가 일제히 일어선다 들고 일어나 창틀을 넘는다 아침이 일거에 쏟아진다

 

 


 

 

장유니 시인 / 다섯 개의 계절을 주머니에 넣고

 

 

니콜라이 행 열차를 타고 떠나자 6월의 백야

페테르고르프가 어딘지

아무튼

 

닥치는 대로 일요일

가는 곳마다 오늘밤은 무도회

 

한쪽은 꿈을 풀고 다른 한쪽은 눈을 감고

나는

열 개의 손가락을 입속에 넣고

젤 아트로 빛나는

손톱들

 

가난뱅이 애인 때문에 윙크하는 것도 잊어버렸지만

도개교를 혼자 건너서

 

맨발로 당신을 끌어안으면 콜록콜록

찬바람

 

드보르초비아에서 방향을 놓친 계절과 북극으로 가는

길을 이어보다가

숫제 잠에 빠져버리는 건 어때?

어쩔 도리 없지만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궁전이 녹아내리는 밤에

 

한 번도 균형감각을 잃은 적 없는 네바 강의 강 수위와

주머니에 넣어둔 페가수스 별자리가 휘청휘청

다섯 개의 계절을 건너고 있다

 

 


 

장유니 시인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학사 및 미국 펜실바니아주립대 석사 졸업. 2019년 계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중앙대 및 서울교대 등의 대학에서 영어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