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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기현 시인 / 배롱나무 성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3.

조기현 시인 / 배롱나무 성찬

 

 

배롱나무는 다시 상(床)차림을 한다

 

뻗쳐 올린 가지 끝마다

한 접시 한 종지 한 사발 한 대접

꽃밥과 꽃찬과 꽃국 들을 담았다

 

몸살 차살 하던 태풍 지난 게 엊그제, 곧장 또

두레상으로 한 상 차려 받든 것이다

 

- 거기, 누구 없소?

하늘 쪽을 향해 나는 외친다

 

- 진지 드시오!

 

 


 

 

조기현 시인 / 쓰레기 명상

 

 

고적하구나, 어둠은

벌써……

 

아파트에 살며

쓰레기를 들고 나온 저녁

배출소엔 먼저 내놓인 쓰레기봉지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온몸을 꽁꽁 싸맨 채, 등과 등을 맞대고

곧 이송될 포로들처럼

웅크린, 저 영혼 없는 존재들

 

어디서 소멸을

이루게 될까

 

그렇지

어릴 적 혼자일 때면,

쓰레기하치장을 뒤지며 놀곤 했었어.

그곳은 껍질과 찌꺼기, 깨지고 찢기고 무르고 썩은 것들만의 아수라였으나……, 꿈도 욕망도 미처 싹트지 못했던 시절, 세상이란 게, 인생이란 게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무연히 깨치게 해주던 곳, 그리곤 오래도록, 묵연히, 교실마다 칠판과 책걸상이 있던 학교를 다녔을 뿐

그런 기억뿐이건만,

그새 어찌하여 낯선 공장들의 가동음(可動音)이 내 음성 속에서도 나기 시작하였던 것인지, 그로부터 그 공장들엘 드나들며 나도 뭔가를 파먹고 살아온 건 부인할 수 없지만, 그 공장들도 그만큼 나를 갈아 먹고 녹여 마셨던 것, 어쩌다 우리는 숱한 나날들을 그렇고 그렇게 보내버렸는가. 다만 여기, 내 손에 수북 들린 건, 그 세월이 남긴, 우리가 서로 그토록 엄정히 주고받았던 영수증 따위들

 

잘 가라, 한물 가버린 영혼들

 

지난 날 매립장으로 갔던 너희도

오늘엔 소각장으로 간다지,

 

공교로워라, 사람의 시신(屍身)들도

그와 마찬가지로구나

 

또한 여기 우리가

이미 마찬가지로다

 

편히, 잘 쉬라

 

 


 

조기현 시인

대구에서 출생. 1983년 <시와 해방> 동인으로 작품 활동하여 1986년 《시문학》 추천으로 등단, 시집으로 『길들의 여행』(1989) 등이 있음. 그 외 문학평론 활동. <시와 해방> 동인(1983). 계간 《사이펀》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