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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정원 시인(포항) / 봄 빛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3.

김정원 시인(포항) / 봄 빛

 

 

바위산 하나가 가슴 열고 강둑 지나

드센 바람 비켜 마을에 다가선다

'立春大吉' 기둥에 붙어

조올고 있던 빛살이

누워 앓는 사람의 손등에

한웅큼 기운 실어 무릎을 세운다

덤불 속 죽은 듯 풀싹들이 다투어

봄빛 끄집어 당겨 얼굴 내미네

한결 개운해진 걸음걸음

내 얼음 발바닥에도 새싹 돋나봐!

 

 


 

 

김정원 시인(포항) / 산의 울음

 

 

지우개처럼

몸이며 살이며 요리 조리 다 뜯어주고

그냥 소멸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살아 있는 동만은

슬픔이 남는 골짜기

무엇을 자복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마음처럼 숨기기 어려운 곳 없어

산은

자주 밤에 운다

 

스치는 해와 달, 밝아지는 눈

그래도 이승은

살 만한 곳으로 보여질 때가 있다

 

목탁 치는 스님처럼 앉아

오늘의 향과 맛에 어울리게

마음을 공양드리고 있다

 

 


 

 

김정원 시인(포항) / 놀라기 잘하는 산비둘기는

 

 

놀라기 잘하는 산비둘기는

일몰의 시간에 무엇을 하나

어제 사온 패랭이 화분에

자꾸 자꾸 물을 주며 부탁한다

넌 어여쁜 그대로 시간에 멈춰라

 

되돌아 보니

가르침을 배우는데 시퍼렇게 숨찬

그 한철이 좋았다

사랑을 익히는데 혼자 피는 꽃마냥

골몰했던 그 폭염도 좋았다

 

되돌아보니

바닥에 초라한 얕음

가르침도 사랑도

어느덧 내 지각은 암벽

스스로 문을 닫고 있다

 

생의 모래톱에 묻은 소금기, 인제는

몸의 베일을 벗어놓기

이빨이 슬금 슬금 빠져나간다

탄생 때 맨 마음 갖다놓기

두 눈이 어둑 어둑 영혼이 물러간다

 

놀라기 잘하는 산비둘기는

일몰의 시간에 무엇을 하나

 

 


 

 

김정원 시인(포항) / 열정 없는 시간 속에

 

 

저 하늘에 무늬구름 몇 조각

그려지지 않았더면

내 눈은 허수아비 되어 허공을 파헤쳤을 거요

 

밤하늘에 별들이

저리 소근대지 않았다면

기도를 모르는 세상을 불태웠을 거요

 

산에 들에 나무들 모든 풀들

꽃을 피우지 않았다면

열정 없는 시간 속에 허우적거렸을 거요

 

늦여름 매미소리

요란히 울지 않았더면

풋사랑도 그렇게 아프진 않았을 거요

 

강물이

저리 유유히 흘러가지 않았더면

내 마음 어디메 누울 곳 없었을 거요

 

 


 

 

김정원 시인(포항) / 아버지의 등나무

 

 

어버이날에는

인제 아무데도 가서 뵈올 분이 없어

등나무 곁을 서성대면

지금도 잎새에 흔들리는 환한 웃음

 

철 없던 숙이

방울꽃 이파리를 똑똑 따 보이면

아버지는 등나무 아래서

내 그늘이 되어주고

 

먼 신기루같이 떠오르다가

엷은 달빛으로 머물다가

새벽녘의 꿈같이

시리게 져버리는 담소(談笑)

 

한 줌 가득 등꽃을 주어

골목길에 서면 눈에 밟히는 보랏빛 유년

 

내 봄, 어버이 그 나이테로

조마로히 미끄러져 가고 있네

 

 


 

 

김정원 시인(포항) / 날물 들물

 

 

단지 내의 사잇길로

어린 나무 한 그루와

시들한 대궁이 풀 한 포기가 걸어온다

정스레 이야기도 날려온다

 

아이는 보기 좋은 나무

뻗어오르는 수액에

할아버지 목소리도 초록에 물든다

 

아이가 건네 준

갓 익은 복숭아 한 개

한 입 듬뿍 깨문 채

하늘 바라보면

 

오늘 따라

별난 이승의 맛

정수리에 입력되는 복숭아 향기

유월의 제철이라

 

손잡고 나란히 흘러간다

흙에서 오르내리는

들물 날물이.

 

 


 

 

김정원 시인(포항) / 동굴에 와서 1

 

 

어머니의 그윽한 배 속에

다시 갇혔나 싶었다

 

눅눅한 어둠의 무게

더듬어 오는 까마득한 맥박소린 듯

돌부릴 울리는 물방울 소리

 

구름

 

갯바람도 고스란히 말을 잃어라

깊은 잠에 묻히는

서늘옵고 향그런 궁전

 

하늘 아래

녹아 흐른 거대한 시간

낱낱 불기 파릇한 숨결로

여기 영지버섯처럼 층층이 피었구나

 

정적의 여유에 돌아와

무시(無時)에 사는 또 한 세상

 

높여 둔 기둥에서 김이 서려

누군가 날 내려다봄에

으리으리 쳐다보니

이마 위에 얹히는 방울 물

 

시원의 넋이여

나는 물이었어라.

 

 


 

 

김정원 시인(포항) / 피아골 뻐꾸기

 

 

너의 눈물 될까봐

고운 노을 못오는

피아골

 

높새 바람에 실려간 줄 알았지

꽃나이 유령들

낙엽을 깔고 수의처럼 흐느낀다

 

작달비 내리고

또다시 소나기 퍼붓고

눈발 흩날려

 

그렇게 피비린내 씻은

몇 드럼의 피를 먹은 나무들

지리산을 새파랗게 아름답게 살찌워

 

종내는 한 그릇의 사발밥

봉우리만 눈 앞에 어른거려

적이 누군지 잊어버린 아이러니

아흐, 아흐, 울며 돌며

피아골에 갇힌 벙어리 뻐꾸기

네가 하고픈 말은 뭐니

 

식은 몸

흙 한 줌 덮어줄

짧은 기도도 없었음

 

아, 죽이지 않고

죽지 않을 수도 있었을

신앙 같은 푸른 하늘이 어디메뇨

 

산새인들 눈물 핑 돈

피의 능선에

나리꽃은 눈 뜨고 석호처럼 섰네.

 

 


 

 

김정원 시인(포항) / 전철길 풍경

 

 

밖에 들국이 피었는데

신문팔이 소년이 살인을 외친다

먼지투성이의 나무를 교회탑이 스치고

 

밖엔 들국이 피었는데

장님 부부가 하모니카를 불면

등에 업힌 아가의 눈은

샛별같이 초롱거린다

 

학생들

둥지로 돌아가는 저녁 새떼처럼

지친 눈 크게 뜨고

셔츠 웃음을 알록달록 날린다

 

문이 열리면

긴 열차 가득히

때 묻은 신발들이 오르내리고

때 묻은 나무와 함께 떠내려간다

 

삶의 한가운데 헤집고 들어와

물 위를 달리 듯 미끄러져간다

도사린 고통마저 떠내려간다

언덕 위

억새풀이 어둠을 쓸며

늦도록 하루를 실어나른다.

 

 


 

 

김정원 시인(포항) / 적군의 묘지

 

 

여기 수영 고갯마을

먼지로 가라앉은 무덤 두 기

 

비릿하게 맥박치는 가지 끝

멎은 듯 숨쉬는 인기척

네가 바람을 낳구나

 

백년을 지기(地氣)에 산다더니

육체의 질료(質料)

흙으로 돌아가기 그토록 힘겨워

찌흐릉 찌르르 그대 꿈 아직 날으나

 

그러다가 보름달이 질펑이면

창백한 두 손이

고향을 눈 앞에서 중천을 휘젓다가

파아란 싸리나무 수염만

수욱 수욱 자란다

 

앗사, 눈 떠보니 별나라 부둥켜안고

드디어 무한에 통한 고요

아침 이슬이 맺는다

 

밭고랑 이랑마다

콩꽃이 한참 호랑나비 너울대고

끈적한 그날의 핏자국을 지었거니

그런 일 없었던 걸로

 

마을 사람들

적군의 묘지라며 돌아가는 비탈 저편

패랭이꽃 두어 송이

천사처럼 무릎을 꿇는다

 

차라리 황홀한 노숙(露宿)임이야.

 

 


 

 

김정원 시인(포항) / 靑山에 노래하는 사람아

 

 

내 온 몸 다 열어

한껏 너를 마중했거늘

긴 몸살 봄꽃 피워

아침새도 불러 앉혔나니

 

청정수로 목축여 너를 주었거늘

인연 따위

등 돌리고 냇사 홀홀이 가던 너

 

땅 위의 형벌

유배의 섬에서

안간힘을 세운다

 

뼛골에 고인 멍물피의 아픔

목 비틀어지도록 수화(手話)의 몸짓이다가

달 보고 멍멍! 산덩이 몸째 울다가

지금은 깜깜하여 너들에게 분노를 훌붓는다

 

두려움이란 없는 건방진 업보며

내 죽고 너 죽을 수밖에 없는

밤녘 문턱에서

어떻든 감당하라

 

가마득한 천혜의 길

꿈 같은 시절의 환한 천지

전설의 나라 그 층계에

아무 애탐 없이 그대로 닿고 싶다

 

보시오

청산(靑山)에 노래하는 사람아

마디마다 음혈로 굳어진 병은 깊어가는데

나무는 잠 속에도 자라고 싶어

잠 속에도 아기나무 옹기종기 낳아

푸르게 싱푸르게 자라

너들의 아들 딸 그 후손을

연(緣)의 품으로 따뜻이 보듬어 주고 싶어

황홀한 일몰에 기도를 드린다.

 

 


 

김정원 시인(포항)

1932년 경북 포항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 졸업. 동 교육대학원 및 명지대학원 졸업. 1985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시집 '시간의 순례' '시린 손을 닦으며' '허(虛)의 자리', '삶의 지느러미', '분신' 등. 율목문학상, 민족문학상, 소월문학상, 세계시문학대상 수상. 여성문학인회 이사, 미래시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