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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동옥 시인 / 화살나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4.

신동옥 시인 / 화살나무

 

 

젊어서는 소리깨나 했다

육자배기 가락을 크게 한 바퀴 돌아서

 

손가락에 반지를 꿰듯 고향엘 들렀다, 타관에 들어서는 드높던 목청이 절구통 수챗구멍으로 졸졸 새 나가는 통에 주저앉았다

 

조왕신이 들러붙은 거겠지 북채로 이랑을 갈고 꽹과리로 도랑을 파 보았댔자, 농사에는 젬병이었다 두드리면 마른 흙 툭툭 부서지는

 

농사월력 너머 흙벽으로는 자식 여섯을 낳아 길렀다 봉제공장으로 신발공장으로 읍내 농고로 그나마 사람 노릇하는 셋을 보내고

 

남은 셋은 버버리였다 소리 귀신이 들러붙어서, 밑을 탄 내복 입혀 고방에 가두어 두어도 피붙이라는 게 풀기엔 질척이고 엮기엔 짧은 이끼나 매한가지

 

굴 껍데기 갑오징어 뼈에 마른 닭똥을 갈아 만든 고약을 발라서 침독 오른 입언저리 번들번들, 볕 좋은 날에는 마당가에서 서로 이나 솎으며

 

소라고둥 배를 타고 뜰방을 건너는 채송화 고깔모자나 툭툭 터트리며, 베잠방이로는 피가 배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울력하고 매구 치고 품앗이하고 새참 먹고 강퍅한 욕지거리에 등짝이 굽어서 농사라야 저마다 외로 된 몸뚱이가 지어 온 업으로

 

몇 방울 먹물에 스미면 이름이야 뭐가 되었든 좋으니 농사꾼은 절기를 손끝으로 더듬고 소리꾼은 말씨보다 울대가 먼저 지은 몸의 내력

 

사지육신에 맞춤한 구덩이를 파고 사방 벽을 두른 다음 지붕을 해 얹고 울타리로는 화살나무를 심었다

 

잔털 하나 없는 이파리마다 뾰족한 톱니, 줄기로는 희고 널따란 날개를 달고, 오종종한 가지 끝은 칼날을 벼린 듯

 

화살나무, 울안으론 한 뼘도 들이지 않으려 갈기갈기 달아나는 하늘 봐라 모래 한 줌 손에 남지 않는 것은 누구도 제 살던 곳으론 선선히 돌아오지 않는 탓

 

더는 정처 없음에 들리지 않으리라 싹 틔운 떡잎은 저이끼리 뭐라고 뭐라고 속삭이더니 새잎 곧 피어나는 줄기마다 신명 나게 서슬 퍼런

 

화살나무, 울 아래 잠든 적 있다 오래 배긴 옹이에 이마를 대고.

 

 


 

 

신동옥 시인 / 하동

 

 

하동 가려나, 내 삶은

소년이 없다 그이는

비둘기호 타고 달아났다 동쪽으로

진주까지만 가자 싶어 처음 건넌 강은

 

별이 똥을 누러 온다는 옛말 은빛

모래 아래 재첩이 여물고 송홧가룬 멀리

고성 통영을 넘어간다는 뜬소문

그 밤을 거기, 혼자 저물도록

 

눈 감았다 이제도록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물빛 너머로 흩어질 때까지 비워둔 자리마다

가시 돋친, 솔잎은 바람을 많이 들여서

둥치마다 억척스레 감아 오르는 덩굴손

 

학교 같은 건 때려 치자 강 따라 트럭을 몰며

티브이 세탁기를 등짐으로 저 나르기 한 해

모래는 깊었다, 스물다섯 초봄

엘지 오백 리터 냉장고를 들쳐 메고

조각배에 옮겨 싣고 견인줄을 잡아끌며

 

걸어온 길을 되짚어 건넜다

강 끝은 절벽이더군, 너머로는 옥룡 다압 옥곡

별천지처럼 물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뻗어가는

널따랗고 탐스런 이파리 활엽교목들

 

바람 한 점 없는 가지를 매화꽃 날리던

서른셋, 봄 가고 남김없이 져 버려라 영영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남은 해 다하도록

벼리고 또 벼리던 빛살은 모래 알갱이 사이사이

 

뒤채듯 자듯

물이랑을 바늘로 찍어 누르는

달빛 점묘, 모래는 새하얗게 달아올라

이제도록

 

벚굴이 살찌고 은어가 돌아온다는

하동, 가려나.

 

 


 

신동옥 시인

1977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1년 《시와 반시》신인상 공모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랜덤하우스, 2008),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고래가 되는 꿈』 등이 있음. 현재 인스턴트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