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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건우 시인 / 봄 땅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5.

이건우 시인 / 봄 땅

 

 

곰슬한 봄 땅에 나가

한 줌 흙 움켜 쥐면

보실보실한 마음

내 안에 들어온다

 

제 품에 맡겨지면

누구의 자식이냐

묻지 않는다

 

잡초의 것이든

알곡의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제 자식마냥 품는다

 

창조주의 뜻에 따라

씨알에 담긴

그 모양대로

피워낼 뿐

 

어떤 모양으로 자라든

어떤 열매로 맺히든

개의치 않는다

 

사력을 다해

씨알에 담긴

생명을 틔운다

 

생명을

가리지 않는 마음

 

봄 땅에 나가

그 마음 한 줌

담아오다

 

 


 

 

이건우 시인 / 이별하는 방법

 

 

왜 나는

이별한 후에야

상대를 향한

내 진심을 알아보는 것일까

 

그 진심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별한 후에야 나타나서

이리도 내 마음을 과롭게 하는 것일까

 

슬픔에 빠져 헤어나갈 수가 없다

 

슬퍼하고 슬퍼하고

또 슬퍼하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슬픔이 제 발로 일어서

제 길 가려 일어서기 전까지는

 

슬퍼도 밥을 먹고

슬퍼도 잠을 자고

슬퍼도 일을 하고

슬퍼도 살아간다

 

그러나

한 가지 또렷한 생각은

 

진짜로 아파하며 슬퍼해야만

진짜로 이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별 중

 

 


 

 

이건우 시인 / 백일몽(白日夢)

 

 

바람 한 점 없는 날

그림 같은 조각배에 누워

 

햇살은 따사롭고

호수 물결 잔잔하고

하늘엔 흰 구름 양 떼처럼 둥둥

저 멀리 초록 산천

내 마음을 다정히 다독인다.

 

모든 사물

제 자리에 단정하고

흘러오고 흘러가는 시간에

거스름 하나 없다.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내 그것을 이루고

누린다.

 

꿈이어도 좋고

생시라도 좋은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완전한 평화

 

그러다 툭

무언가 살짝 부딪쳐

방금 전 누리던

그 완전한 평화

산산이 깨워준다.

 

화들짝

꿈인가

생시인가

 

깨졌다.

우습다.

 

 


 

 

이건우 시인 / 반동(反動)

 

 

겨울밤 좋아하는 내가

여름 한밤중에 깨어 있다.

 

온 나라 찜쪄먹을 듯

맹렬하던 기세가

입추 지나

갑자기 겸양을 떤다.

 

그에 따라

나도 반동적(反動的)이 된다.

 

쳐지고 늘어져도

강인한 태도로

여름과 대치했건만

왠지 나도 한 풀 꺾인다.

 

언젠가

아버지의 등이

노인의 그것처럼

보이던 날

 

아버지를

이겨 보겠다

당신을 넘어서겠다

박박대고 덤비던 녀석이

 

어깨동무 걸치는

오랜 친구 대하듯

반동적이 된 것처럼

 

삶은

반동(反動)인가

 

*반동(反動) : 어떤 물체가 다른 물체에 힘을 작용시킬 때, 작용을 받은 물체가 똑같은 크기의 힘을 원래의 물체에 다시 미치는 작용

 

 


 

 

이건우 시인 / 일상(日常)

 

 

올림픽 출전한

선수처럼

카메라 앞 연기하는

배우처럼

 

가진 기량과 재능

마음껏 뽐내고

펼쳐보인 후

후회없이

대회를 마치고

촬영을 마치고

제 집으로 돌아온다.

 

일말의 아쉬움 없이

신명나게 한 판 놀았으니

후련하다.

 

삶이 그러하듯

매순간의 경기에 연기에

진심을 다한다.

 

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2020도쿄올림픽 여자배구 4강 진출을 이뤄낸 김연경 선수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을 읽고 ...

 

 


 

이건우 시인

1996년 울산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윤리교육학과. 2018년 계간《포엠포엠》 제14회 신인작품공모 당선으로 등단. 시집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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