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혜숙 시인 / 폐사지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15.

최혜숙 시인 / 폐사지

 

 

설악산 깊은 골에

짐승처럼 쓰러져 누운 암자 한 채

 

산 넘어 간 종소리 돌아오지 않고

허공을 옮기던 목어도 사라지고

스님의 독경소리 끊긴 지 오래다

 

수만 근 적막이 담장을 치고 있다

 

산문은 하늘로 열려 있어

밤이면 달빛이 내려오고

별들은 마당을 쓸고 간다

 

밤이 깊을수록 진해지는 솔향

 

산 귀퉁이 어디쯤

너구리와 고라니와 노루와 꿩

다람쥐가 달빛을 덮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새와 벌레 울음소리가 고요해진 산은

나뭇잎 하나 떨어지자 부스스 깨어난다

 

 


 

 

최혜숙 시인 / 어느 몽상가의 등불

 

 

침묵이여

내 안에서 타는 빛이여

나를 살게 하는 힘이여

내 영혼의 깊은 잠을 깨워다오

 

침묵이여

내 혼을 관통하는 등불이여

날개 치며 일어나는 불꽃이여

내 생을 떨게 하는 힘이여

 

침묵이여

내 혀끝에서 지워지는 신의 선물이여

날카로운 사각의 모퉁이에서 흔들리는 기억이여

어둠 저편에서 머뭇거리는 이미지의 편린이여

 

침묵이여

강물 위로 떠다니는 노래여

갈대 사이에서 흐느끼는 바람의 변주곡이여

내 몽상의 근원이여

 

 


 

최혜숙 시인

경기도 평택 출생. 동국대 불교대학원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수료. 2007년 《시현실》 봄호로 등단. 시집으로 『그날이 그날 같은』, 『몽상가의 등불』이 있음.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