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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이강 시인 / 소독차가 사라진 거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8. 31.

김이강 시인 / 소독차가 사라진 거리

 

 

방과 후에는 곤충채집을 나섰지만

잡히는 건 언제나 투명하고 힘없는 잠자리였다

 

우리는 강가에 모여 잠자리 날개를 하나씩 뜯어내며

투명해지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익사한 아이들의 몸처럼 커다란 투명

정환이네 아버지 몸처럼 노랗게 부풀어오르는

투명 직전의 투명

 

우리는 몇 번씩 실종되고 몇 번씩 채집되다가

강가에 모여 저능아가 되기를 꿈꾸는 날도 있었지만

우리들의 가족력이란 깊고 오랜 것이라서

자정 넘어 나무들은 로켓처럼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가

아침이면 정확히 착지해 있곤 했다

 

몇 번의 추모식과 몇 번의 장례식

몇 개의 농담들이 오후를 통과해가고

낮잠에서 깨어나면 가구 없는 방처럼 싸늘해졌다

우리에게 알리바이가 필요했다

 

방과 후면 우리는 소독차를 따라다니며 소문을 퍼뜨리고

우체부를 따라다니며 편지들을 도둑질하고

강가에 쌓인 죽은 잠자리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는 드디어 형식적 무죄에 도달할 것 같았고

우리는 끝내 자정이 되면 발에 흙을 묻힌 채 잠이 들었다

 

몇 번의 사랑과 몇 번의 침몰도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가 세상 끝 어딘가에서 착지하고

 

 


 

 

김이강 시인 / 바람 부는 날에 우리는

 

 

바람 부는 날에 알게 되었다

슬픔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걸이에 대하여

 

고요한 소용돌이에 대하여

줄을 풀고 떠나가는

때 이른 조난신호에 대하여

삐걱삐걱 날아가는 기러기들에 대하여

아마도 만날 것 같은

기분뿐인 기분

아마도 바위 같은

예감뿐인 예감

 

어디선가 투하되고 있는 이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구부려도 펴도 나아지지 않는,

 

 


 

 

김이강 시인 / 여름 정원

 

 

그의 허리에 묶여 있던 리본이

잎사귀 그림자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벤치에 앉아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장마 같고

 

우린 산더미처럼 쌓인 이야기들을 향해 걷는데

그런 것들은 항상 비가 온 후의 물방울들 같고

 

가까운 미래들이 반음계씩 내려가면

다시 이 숲에 이르게 된다

 

그가 돌아서서 벤치로 왔을 때

작고 꿈틀거리는 달팽이 같은 걸 상상하며 손 내밀었을 때

 

내게 올려줄 것이

그저 맨손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다시 온 여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손을 맞잡은 숲의 계단은

기하학적으로 겹치었다가 분열하는 것이었는데

 

반도네온처럼 사뿐히 늘어나고 나면

다른 세계의 무릎 위로 옮기어질 일만 남은 것 같고

 

여름은 오고

잎사귀는 검고

 

벤치에 앉아 이런 걸 생각하고 있으면

아직 이르지 못한 이야기 같고

 

옮기어진 달팽이를 오래 구경한다

그가 내게 손을 뻗을 것이다

 

 


 

 

김이강 시인 / 잘 알지도 못했지만

 

 

당신이 사준 책상엔 서랍이 달려 있어요

부드럽게 열렸다가 느리게 닫히는군요

내부는 눈부신 빛깔의 자작나무예요

 

당신의 선택이 옳아요 사실은

슬며시 비난했던 그 스피커도 아주 탁월한 안목이었어요

 

부드럽게 느리게

누워 있으니 좋군요

 

흩날리고 있어요

구두에 쌓이기도 하는군요 바깥은

 

거대한 수거함 내부 같은 밤

누군가 남기고 간 짐들이 빈 거리에서 기어나오는 밤

 

고급 레일을 사용한 덕분이겠죠

눈은 멈추지 않고 오래 내립니다

 

오늘 저녁엔

이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부드럽게 열렸다 느리게 닫히는 것이

있어서 좋군요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1년 여름호

 

 


 

 

김이강 시인 / 바흐 이덴

 

 

새벽에 바흐 이덴은 산책을 나섰다.

 

그는 경찰들이 서 있는 성 아래를 지나 구 시가지를 향해 걸었다. 밤하늘에 덮인 먹구름 사이로 더 짙은 하늘의 빛이 쏟아지고 있다. 낮에는 관광객들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던 수도사들도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성당 문은 잠겨 있을 것이다. 머플러를 고쳐 맨 그가 성당의 문을 두드린다. 문 안에 배열된 긴 의자들, 성수가 흐르는 물길, 반짝이는 마리아상을 생각한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이 바깥으로 퍼져 나오고 있다. 다시 문을 두드린다. 그는 수도사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계단에 앉았다. 성 아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지나 경찰들의 검문을 다시 받아야 한다. 그러고 나면 동이 틀 것이고 성당 문은 열릴 것인데. 그저, 카를교를 세 번쯤 지나면 되겠구나. 그는 생각한다. 천천히 걷는다. 다리를 따라 늘어선 동상들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이렇게 이어지는 시간이 성스럽다고 생각한다. 한 번 연주가 끝난 스메타나의 음악이 바흐 이덴의 생각 속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조국을 위하는 제목을 가진 덕에 원 없이 연주해도 방해받지 않은 곡. 그가 검은 옷을 입은 사제였던 날들. 바흐 이덴에게 부여된 아름다운 발음의 이름.

 

바흐 이덴은 카를교를 세 번 지나지 않았다. 동은 텄다. 탄탄하게 다져진 팔과 다리를 가진 사람들이 조깅을 한다. 바흐 이덴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곁에 아이 하나가 다가선다. 그 앤 다정하게 바흐 이덴을 올려다본다. 이곳이 마음에 드는 듯 바흐 이덴의 곁에 서서 유구한 물결을 바라본다. 그는 계단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유일했던 그 이름으로 그곳에 입장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두드리지 않아도 지금쯤 문은 열려 있을 것이다. 닫혀 있는 동안에만 그곳에 갈 수 있음을 그는 깨닫는다. 모든 성상을 만진 손을 향해 아이가 손을 내민다. 아이의 눈에서 빛이 바깥으로 퍼진다.

 

그는 카를교를 건너간다. 그가 빠져나온 형태로부터 아침이 벌어진다.

 

-계간 《문학과 사회》 2020년 겨울호

 

 


 

김이강 시인

1982년 여수에서 출생. (본명: 김혜진) 한양대학 국문과 졸업 및 대학원 박사 과정. 2006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당신 집에서 잘 수 있나요』(문학동네, 2012), 『타이피스트』가 있음. 제2회 혜산 박두진 젊은 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