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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영랑 시인 / 네트의 뉘앙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6.

최영랑 시인 / 네트의 뉘앙스

 

 

불편해, 그래서 너와 함께 복식을 구성할 수 없어 패배와 승리의 기분 또한 내 것이 아니잖아 셔틀콕을 쫓아가는 본능 때문에 그저 우리가 되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내 옆을 서성이는 것 말고 스텝 바이 스텝, 나에게 멀어질 방법을 궁리해봐 손의 감각으로 아슬아슬한 높이를 사랑하는 건 위험해 내가 움츠리는 건 반칙이니까 후회는 선을 넘지 못한 아주 미미한 수치로 판가름 날 거야

 

날렵함에 집중하며 점프를 끌어 올려봐 내 키는 늘 고만고만하니까 오래 다진 순발력은 오늘에 대한 진지한 태도겠지

 

바닥에 널브러진 발자국들의 환영을, 훅 치고 들어오는 스매싱 같은 타인의 시선을 열심히 연기할 필요는 없어 우리의 태도는 딱 거기까지야 관계 말고 관심 말고 관성만을 떠올려 너는 처음부터 저쪽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으니까

 

계간 시와 소금2021년 가을호 발표

 

 


 

 

최영랑 시인 / 넌 기린이 될 수 없어

 

 

꿈이 잠을 당기는 걸까 잠이 꿈을 당기는 걸까 흩어지지도 않고 악착같이 뭉쳐지는 장면들, 저녁의 횡단보도 앞의 나와, 아침의 횡단보도 건너편의 내가 섞인다

 

나는 왜 이곳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걸까 뒤돌아보니 따라 건너지 못한 내 그림자와 기린 한 마리가 급브레이크 자동차 앞에 서 있다 나의 비명이 모스부호처럼 속도에 감겨들고 파열된 얼룩무늬가 사방으로 흩어진다

 

키 작은 기린처럼 내가 슬프게 웃는다 여전히 그림자를 질러가는 자동차들, 나는 자꾸만 발돋움을 하는데 내가 점점 작아진다 신호등 앞에서 붉은색도 초록색도 아닌 점멸되는 건너편을 망연히 바라본다 넌 기린이 될 수 없어.’속삭임 같은 환청이 들린다

 

몽롱한 아침이 눈을 뜬다 키 큰 그림자와 키 작은 내가 겹쳐진다 이젠 악몽에게 솔직해져야 할까 하이힐의 감정을 좀 더 끌어 올려야 할까

 

또 다시 시작된 아침 8, 넘쳐나는 생각들이 바쁘게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나만 혼자 꿈속에 서 있는 것 같다 비명 속 얼룩무늬가 자꾸 복사되고 있다

 

나다운 나는 어떤 그림자 속에 존재하는 걸까

 

계간 창작212021년 여름호 발표

 


 

최영랑 시인

1958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5문화일보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발코니 유령(실천문학사, 2020)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