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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향란 시인 / 겨울산에 합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9. 26.

최향란 시인 / 겨울산에 합장

 

 

수직이 아니어도 기어서 당당한 줄사철나무를 만나

차가운 수직의 본능과

신열에 부어올라 들리지 않았던 시간은 헛된 모래시계냐

아직 물음 던지지 못한 눈 내리는 마이산

 

온 세상에 눈이 내리고 또 내리는데(1)의사지만 시인이고 싶은 지바고

용납 못할 개인의 자유와

얻을 수 없는 그녀를 껴안았던 시인의 얼음 별장

하얀 눈은 세상의 끝에서 끝까지 휩쓰나니(2)

눈 내리는 마이산에서 우리는 다시 흰 빛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은수사 마당에 깊게 홀린 겨울 꿈 헤치고 보니

안과 밖에

온 길과 갈 길에

환히 보이는 그 곳에

유치찬란이라 누락 시켰던 야윈 사랑 치욕으로 잊었던 자유가

시인의 금지된 사랑이 온힘 다해 얼음산 기어서 오르는데

거짓말처럼 다 순하다

 

줄기에서 뿌리 내려 또 시작하는 줄사철나무처럼

완성은 아픈 상처쯤에서 늘 발아했다 말하려 하는가

 

* 1. 2 러시아소설 닥터 지바고중에서

 

 


 

 

최향란 시인 / 찬엽이

 

 

찬바람 불던 날

떨어진 낙엽처럼 굴러들어 왔다는

찬엽이는 꽃을 좋아했어

동산에 산벚꽃 환하던 봄 밤

정희네 아궁이 옆에서 딸을 낳았다는 찬엽이는

진달래꽃, 유채꽃, 명자꽃을 업고 다녔어

어린 우리의 장난감이 되어준 어리버리 벙어리 찬엽이

머리에 꽃 꽂고 착한 찬엽이 뒤 따라 다니면

불같이 화를 내던 정희 엄마

정희가 가슴에 산벛꽃 가지 품고 다닌 비밀

나는 누구에게도 끝내 말하지 않았어

울 엄마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찬엽이를

나는, 정희는, 우리는, 그냥 찬엽이라 불렀어

 


 

최향란 시인

전남 여수 출생.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리토피아로 등단. 시집으로 밖엔 비, 안엔 달(리토피아, 2013)이 있음. 여수 해양문학상 시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