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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미경 시인 / 바이올렛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1.

고미경 시인 / 바이올렛

 

 

마음이 식었다는 말은 하지마 너무 슬픈 말이잖아

소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몽골가젤처럼 냅다 뛰었죠

 

앞머리를 말았던 빨간 구르프야, 입술에 촉촉하게 와 닿던 딘트야, 함께 음악을 듣던 이어폰아, 울음을 참아줘 제발

 

제비꽃이 피어난 봄날

소년은 소녀에게 고백했었죠

중력을 벗어나고 싶은 오토바이가 있어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지구 밖으로 달리고 싶어

너를 옆구리에 꿰차고 멀고 먼 안드로메다로 떠나고 싶어

 

패밀리 마트에서 삼각 김밥과 바나나 우유를 나눠 먹으며

소년과 소년은 식구가 되었죠

작은 시냇물처럼 밤새 흘러갔죠

 

텔레비전 화면 속 고속도로에는 전복된 탱크로리

거짓말을 해버린 소년도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어 마구마구 달렸죠

 

쓰러진 배달 오토바이

패대기쳐진 그릇들

바닥에 차갑게 식어가는 붉은 국물

 

영화의 엔딩 음악처럼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내려요

마음이 식었다는 말은 하지마 너무 슬픈 말이잖아

 

 


 

 

고미경 시인 / 척독(尺牘)*

 

 

꽃에 눈이 멀어 세상이 캄캄했던 적이 있었지요

유폐당한 눈동자는 극약처럼 외로워져

피어나는 꽃들을 죄다 목자르고 싶었고요

 

폐가를 만나면 그 앞에서 한참 서성이는 버릇은

좌절한 탐색자의 앨랑꼴리 같은 것

 

아직 깨어나지 않은 술집점포들이

우로보로스뱀처럼 어둠의 꼬리를 입에 문 채 늦참에 빠져 있는 오후

 

모과나무의 푸른 잎사귀들 사이에 숨어서 피어나는

연분홍빛 꽃잎을 본 적이 있나요

거기에서는 슬픔을 조금씩 삭여주는 바람이 흘러나온답니다

 

나의 앙상한 등짝에

초록빛 오드아이를 타투해 주세요

계절이 바뀌면 몸통에 매화꽃이 도드라진다는

우수리의 사슴들을 보러가고 싶어요

 

전구를 갈아 끼워도 불빛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크 초콜릿 같은 어둠을 혀끝으로 살살 핥아볼까요

 

밤이 되면 꽃들이 아픈 것은

별빛이 돌아오는 신호라고 중얼거리며

나는 영혼의 습도를 맞추기 위해 가끔씩 글썽거립니다

 

참고) 척독(尺牘)은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글을 적은 널빤지를 말한다. 짧은 편지. 서간(書簡).

 

 


 

고미경 시인

1964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96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인질(문학의전당, 2008) 칸트의 우산이 있음.현재 '시비'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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