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 시인 / 그레텔의 숲 이 밤이 내 몸을 부위별로 노려 오빠, 밤은 더 포악해지고 숲은 더 추워지네 슬픔과 고통이 쌓여 독약이 되는 거라면 나는 누구의 목구멍을 타고 내릴까 살아서 어제를 추억하자던 약속은 죽은 엄마의 입속에 피는 곰팡이, 살갗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어둠의 분자들은 날카로운 주삿바늘들 피노키오, 아무렇지 않다고 거짓말하고 멀리 도망치는 다리를 제발 빌려 줘 악마의 등을 뚫고 솟아오르는 저 허기를 나는 포크라고 불러 내 안을 다 뒤져도 발견되지 않는 웃음을 찾아 비수를 세우고 있는 것 우리가 읽었던 동화가 낡아서 눈물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어 이제 이 스토리 밖으로 나갈 열쇠나 암호를, 밥이나 천사 같은 희고 맛난 말들의 실체를 우리가 악마의 과자를 먹고 새장에 갇힌 사이, 스토리 밖에는 여전히 가난한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언니, 지구는 점점 더 춥거나 뜨거워져서 아이들은 해피엔딩 스토리에도 박수를 잃어버렸어 굶주린 야성의 밤이 졸음을 흘리기 시작하는 새벽, 글린다, 우리는 불면과 불안을 무기로 탈출할 수 있을까요 어느 아늑하고 평화로웠던 하루를 복제하고 그 안에 나를 영원히 가둬 줘요 우리는 너무 빨리 먹혀 버리는 달콤하고 허무한 과자처럼, 내일을 꿈꿀 수 없어 아침이 오기 전에 서둘러 시들고 마는 꽃처럼, 그러나, 그러나, …… 그러나를 되뇌며 새 영혼으로 태어나려 주술을 외는 이상한 숲의, 어떤 작은 꽃의 영령처럼 -Mook 『작가연대」, 2022년 14권 1호 발표 강순 시인 / 곶감이라는 이유 설익은 기억을 허공에 내놓자 바람이 하루 종일 슬픔의 두께를 잰다 푸른 과거로 도망치는 일은 나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나의 운명은 천여 톤의 붉은 질문들 바람에게 슬픔의 두께를 내어놓는 일, 오로지 망각이다 배고픈 바람이 슬픔을 다독여 슬픔을 먹고 슬픔으로 배부르는 일 망각은 버거운 사치여서 밤마다 어지러운 환상 먼 곳 슬로바키아에서 달빛이 몰려온다 당신에게 달콤한 유혹을 헌사하기 위해 까마귀가 다녀간다 작은 슬픔의 편린조차 잊는 일 모든 망각에는 희망의 꽃씨가 들어 있어 상처 자리 쓰다듬은 지 백번 천번 부끄러운 맨살 위 붉은 꽃 검은 꽃 흰 꽃이 피어난다 혼자 울던 문장들 만 번째 새로운 해답이다 계간 『시와 사람』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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