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김길나 시인 / 0時에서 0時 사이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

김길나 시인 / 0에서 0사이

ㅡ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들녘을 훑고 지나간 바람 끝에서

밀밭 몇 장이 구겨졌다 구겨진 밀밭이

서녘으로 넘어간 뒤에도 남은 밀밭에서는

밀알들이 자랐다

햇빛 쟁쟁한 한낮에 해조각을 베어 물고

둘레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밀알들이 잘 익었다 그리고

그 황금빛 생애는 사라졌다

땅을 떠난 밀알들이 줄을 서서 방앗간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방앗간에 내 걸린

부서진 살 거울에 '는 보이지 않고

는 없어졌다

이 거울로 집을 지은 빵집에서는 누구라도

밀가루 한 줌으로 사랑을 굽고

밀가루 한 줌으로 기쁨을 부풀린다

는 소문이 빵집 밖으로 새어나왔으나

세상의 밥상머리에서의 비만,

비만이 감춘 허기가 소동하는,

빵집 앞은 배고픔으로 붐볐다

 

애찬의 식탁에서

밀알들이 삼킨 해조각들 둥글게 모였다

밀떡에서 뜨는 해 한 덩이! 눈부시다

햇살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

그 처연한 슬픔까지도

 

 


 

 

김길나 시인 / 쑥국

 

 

푸드덕 찬바람을 털어내고

아침마다 한 쌍의 새가 날아와선

창문을 열라 보챈다

그래, 겨우내 움추린 내 몸 안에

봄이 오고 있음이야

나는 이 아침에 쑥국을 끓여

먹는다 버려진 둔덕에서도

밟힐수록 눈 밟힌 쑥이지, 아마.

쑥쑥 목구멍을 타고 국물로 흘러들어와

햇빛 한 아름 불러들이고 있음이야

, 맛있다! 생기나게 하는 이 초봄의

쑥국 맛, 들녘에서 먼저 눈 비비고 깨어나

꽃샘추위로 고독을 달군 이 향긋한 내음이며

차가운 빗물이랑 해와 달과의 고적한 기억을 갇춘, 혹은

그 견고한 사랑을 풀어내는

쑥국 맛 참 맛있다!

 

 


 

 

김길나 시인 / 일출을 마시다

 

 

밥상에 올라온 회는 싱싱하고

홍주는 붉다

진도토박이 정 과장이 밥상머리에 넘실되는

바다 한 컵에 새벽노을을 띄워 칵테일을 한다

그러자 컵에 담긴 사이다 위에서

홍주가 불그레 해 머리로 솟는다

일출주日出酒 라는 이름의 이 홍주 칵테일은

섞어도 섞이지 않는 홍주의 독한 절개가 일품인데

일출을 마신 얼굴마다 홍안이다

 

풍상風霜 깊은 청으로 질팍하게 쏟아내는

박봉매의 남도들노래 가락이 짱짱히 호미자루 잡고

진도 너른 밭가슴을 한바탕 휘돌아 나오는 사이,

운림산방의 산수화 몇 점 풍경으로 두른

홍안의 어깨들이 몇 번이고 흔들린다

 

어느새 해는 중천으로 가고

우리 일행은 해를 따라 바다로 나갔다

출렁이는 파도 위에 떠 있는 사자섬 한 채

무인도에 독거하는 이씨는 쓸쓸함으로도 출렁일 줄 모르나

바지 헤진 틈새로 궁둥이가 출렁거려 아슬아슬한데

아슬아슬한 고깃배들 풍랑에 쓸려간 저 바다에서

아직도 못다 건져 올린 넋이라도 있음일까

유장한 진도 씻김굿가락 밀물로 와 귓전을 철썩였다

 

어찌 물길, 마음 길 트이는 곳이

회동에서 모도 까지랴!

저 바닷물이 갈라지는 봄이 오면

트인 길 쪽에서 돋는 일출을 한 번 더 마시러

진도에 다시금 와야 하리

 

 


 

 

김길나 시인 / 길 위의 묵화

 

 

밤 산책길에

길 위에서 묵화를 만난다

 

나무에게로 바람 한 자락 확 쏠려오자

바람 밖으로 나온 오원*의 질탕한 붓질이

먹물 뚝뚝 흘리며 빠르게 나뭇가지를 스치는데

먹물 머금은 잎들이 일제히 땅바닥에 누워 터뜨리는

묵향, 백 년 전 이 나무 밑을 지나간 발자국들이

그의 붓질에서 묵향 어지럽게 깨어나는 소리

이파리들 움찔 움찔 뒤채며 설레는 기척

오고간 풍경을 퍼 담은 만수산의 늙은 옆구리가

몇 굽이 적막에 휘둘리며 끌려 들어오고

이쯤에서 들통 났다

그의 붓이 휘몰이로 내지른 선 끝에서

홀로 선 내 그림자가 들추어진 것이다 하여,

들추어진 고독 한 알 붓끝에 딸려 나와

묵화 속 점으로 떨구어 졌다

 

내가 떠난 자리에 또 누군가가 들어설 것이다

한 백년 후에도 이 묵화 속에 또 누군가가

점 하나 떨구어 놓고 갈 것이다 벌써

행인 한 사람 옷자락 나부끼며 저기, 오고 있다

 

*오원(吾園):조선 말기의 화가인 장승업(張承業)(1843-1897)의 아호

 

 


 

김길나 시인

1940년 전남 순천시 출생. 본명: 김명희 1995년 시집 새벽날개로 등단하고 1996문학과사회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빠지지 않는 반지 』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홀소리 여행』 『일탈의 순간』 『시간의 천국과 산문집 잃어버린 꽃병이 있음.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