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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채수옥 시인 / 겹겹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4.

채수옥 시인 / 겹겹

 

 

바구니에서 구르고 있는 이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가 언젠가 들었던 것 같은, 선홍빛 잇몸 사이에서 쏟아지는 학대받는 빗소리

 

기울어진 코와

안개가 흘러나오는 입술

뼈를 뒤집는 눈빛

 

나야 나

 

기억나지 않는 잠 속을 날아다니는 유령들, 문 닫은 동물원, 울고 있는 토마토, 모자 쓴 구름들 사이,

 

더욱 간절해지는 얼굴

 

너의 안면이 장애이거나

이곳이 장애이거나

 

서로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들이 마주앉아 함께 밥을 먹으며, 꼭 만났던 사람 같은 기분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알고 있는 척

주머니에 한 손을 넣고 뿔뿔이 흩어지는 눈 코 입을 맞추며

 

도통 떠오르는 않는

너 같은 나

여기 같은 거기

 

시집 덮어놓고 웃었다(여우난골, 2022) 수록

 

 


 

 

채수옥 시인 / 덮어놓고 웃었다

 

 

보도블록으로 덮인 길의 중간이 끊겼다 공사 하다 남은 것들을 검은색 천막으로 덮어 놓고 통행금지 푯말을 세워 놓았다 무엇이 덮여 있는지 모른 채 덮어 놓고 돌아갔다 덮어 놓고 길을 걷고 덮어 놓고 밥을 먹었다 덮어 놓고 오열하고 덮어놓고 섹스를 했다 너는 그것을 덮어 놓고 믿었다 물어볼 용기가 없을 때 덮기로 했다 덮어 놓고 관광버스에 올라 덮인 사람들과 관광을 떠났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먼저 덮었다 시간은 덮어놓고 흘러가고 나는 덮어놓고 다음문장으로 넘어갔다 덮어놓고 저녁이 왔고 우리는 덮어놓고 이별을 했다 덮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을 때 덮어야 하는 것들은 더 많이 생겨났다 보도블록을 덮었던 검은 천막은 공중에서부터 땅까지 그 너머의 것들을 덮고 있었다 검은 천막은 점점 크고 넓게 퍼져나갔다 우리는 더 멀리 돌아가야 했다 검은색 우산들로 상체를 가린 사람들이 앞장서서 걸어간다

 

시집 덮어놓고 웃었다(여우난골, 2022) 수록

 

 


 

 

채수옥 시인 / 젤과 텔

 

 

가마솥 뚜껑을 열자 숲이 솟아올랐다 늑대가 울 때마다 새 아빠가 생기고 얼굴 없는 엄마는 장바구니 가득 새 아빠의 양말을 사왔다 젤과 텔은 양말 속에 들어가 비명이 되었다 새 아빠는 곁눈질에 능통했다 힐긋거릴 때마다 젤과 텔의 옆구리에 시퍼런 연못이 생기고 나무들은 연못 속에서 거꾸로 자랐다 가끔씩 없는 엄마의 손이 떠올라 옆구리를 쓰다듬자 시퍼런 연못은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빵조각은 필요 없었다

새들의 입은 새 아빠보다 빨랐으므로

엄마에게 가는 길이 지워졌다

 

햇빛은 쓸모없이 시들고 젤과 텔은 새 아빠와 함께 긴 시간을 보냈다 그늘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엄마는 오지 않고 새 아빠의 크고 거친 손가락은 길게 자라라 숲을 비틀었다 잠들었던 어린 짐승과 벌레들이 쏟아졌다

가만히 있어봐

 

짧은 문장은 힘이 세고 미식 거렸다 젤과 텔은 가만히가 흘리는 울음을 뒤집어쓰고 가만히를 참으며 가만히를 증오하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가만히를 읊조렸다 엄마는 장바구니 가득 새 아빠의 팬티를 사왔다 젤과 텔은 팬티 속으로 들어가 녹슬어가는 철봉에 매달려 뒤집힌 새 아빠를 낭떠러지로 밀어버리는 꿈을 꾸었다

 

뿌리처럼 길게 뻗어 나온 손가락들이 젤과 텔을 친친 감았다

숲은 무성해지고

새 아빠들은 자꾸만 탄생되었다

 

계간포지션2021. 가을호 발표

 

 


 

 

채수옥 시인 / 이월

 

 

어둠은 우리를 녹여서 단추와 비누를 만든데* 단추 구멍 속으로 방금 누가 지나가는 게 보여 보라색 망토와 검은 장갑을 낀 얼굴 없는 것이

 

화덕 위 고구마처럼 등이 뜨거워지면 겨울은 다 구워지고, 깨진 무릎에서 동백이 피어나 똑같은 패턴으로 번지기 시작해

 

메디팜을 붙이면 새날이 돋아날까

 

작별 인사는 괄호 속에 넣어 두고 상자 속으로 들어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스쳐지나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전월이월로부터 개나리는 피기 시작하고

우리의 공백은 차월되고

 

살얼음 낀 골목은 지명수배자 처럼 꼬리를 감추고 있지 스멀거리는 겨드랑이에서 곧 날개가 돋아날 것 같아 가지를 흔들며 간지러움을 참고 있는 나무들

 

이월을 녹이면

새싹이 될 꺼야

 

우리만의 법칙으로 수용소 담벼락 같은 이 밤을 견디고 나면 봄은 거기 있을까

조슈아

그만 상자에서 나와 더 깊은 겨울 속을 걸어가렴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대사 중 변주

 

계간 시와사상2022. 봄호 발표

 


 

채수옥 시인

1965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 동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2실천문학고문(拷問)2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비대칭의 오후』 『오렌지는 슬픔이 아니고』 『덮어놓고 웃었다(여우난골, 2022)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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