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진 시인 / 설야(雪夜) 눈이 와요, 라는 말 얼마나 유정(有情)한지 함부로 전하지 못하겠네 창 밖에는 사르륵 사르륵 마치 전생의 장례식 같은 고요 한 없이 깊어가고 눈 오는 소리 안에는 내 귀에만 들리는 목소리 낭랑해지는데 눈이 와요, 이 무용한 독백은 끝내 허공을 건너지 못하네 눈송이 눈송이 내려와 한 그루 나무의 실루엣이 바뀌는 동안 나무보다 먼저 마음을 다 덮고 나는 생각하네 왜 추억은 아직도 눈빛을 약속하려 하나 왜 나는 조각난 기억을 붉은 심장인 듯 지키려 하나 기억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찾을 수 없는 밤 그 먼 시절로부터 흰 눈이 오네 -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천년의시작, 2020) 이운진 시인 / 빈 항아리 빈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 저녁을 굶은 아이와 젖이 마른 엄마가 부둥켜안은 것처럼 둥근 새벽에 울려 퍼지는 수도원의 종소리처럼 둥근 항아리에 눈이 내린다 운명이 없는 눈송이들이 항아리에 담긴다 가장 멀리서 가장 깨끗하게 온 것들을 담아 어떻게 이토록 자기의 가슴을 슬프게 만들 수 있는지 빈항아리는 차곡차곡 눈을 쌓는다 슬픔을 발효시키려면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간이 필요하다는 듯 둥근 자세를 바꾸지 않고 모든 기도를 다 드린 마음처럼 둥글게 항아리는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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